설교

[스크랩] 디모데후서 강해

옹기장이 2013. 1. 22. 11:46

 

 

 

 

 

 

 

 

 

디모데후서 강해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강)  딤후 1:1-2  생명의 약속
(2강)  딤후 1:3-8  고난을 받으라
(3강)  딤후 1:9-12  거룩하신 부르심
(4강)  딤후 1:13-14  아름다운 것
(5강)  딤후 1:15-18  사도와의 관계
(6강)  딤후 2:1-6  충성된 사람
(7강)  딤후 2:7-13  참아야 하는 이유
(8강)  딤후 2:14-17 유익이 없는 일
(9강)  딤후 2:18-21  합당한 그릇
(10강) 딤후 2:22-26  주의 종
(11강) 딤후 3:1-9  마지막 때
(12강) 딤후 3:10-17  성경의 유익
(13강) 딤후 3:15-17  성경
(14강) 딤후 4:1-5  네 직무를 다하라
(15강) 딤후 4:6-8  선한 싸움
(16강) 딤후 4:9-18  바울을 버린 사람
(17강) 딤후 4:19-22  형제의 문안

 

 

 

 

 

 

 

 

(1강) 디모데후서 1:1-2  생명의 약속

 

<본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디모데후서 1:1-2)

 

 

 


<설교>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인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향해 ‘왜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느냐? 제발 인정해 달라’고 사정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원칙을 따라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면 버림받는 것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역시 세상이 멸시하고 조롱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외면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의 반응에 대해 민감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외면하고 조롱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가 낙심하고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그 속셈을 의심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과연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길에 서 있는 신자라면 세상에 대해 눈치 보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로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의 당연한 반응으로 여기면서 말씀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에만 모든 마음을 둘 뿐입니다. 1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라는 구절을 보면 ‘생명의 약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의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를 말할 때는 돈과 연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시간은 돈이다’라는 옛말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돈에 빗대어 말합니다. 즉 돈을 사람들이 목적하는 참으로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전제하고 시간이 곧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시간의 중요함과 가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금융지식이 돈이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역시 금융지식이 곧 돈이 되어 돌아오게 됨을 말함으로써 금융지식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뭔가의 가치를 말할 때는 세상이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연결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도가 말하는 ‘생명의 약속’은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가치 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약속은 전혀 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믿는 것이 돈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돈도 안되는 것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거리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의식에도 생명의 약속을 세상의 시각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사도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라고 말하면서,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흥밋거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그런 말들이 내 육신의 문제에 보탬 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귀함과 가치는 그 약속으로 인해서 사망에 있던 우리가 생명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생명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이 귀중할 뿐, 영혼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설사 영혼의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상에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라면 그 영혼의 생명마저 팔아버릴 수 있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세계에서 사도라는 것은 불필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도의 일이 곧 생명의 약속을 전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생명의 약속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에게는 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재미를 제공함으로써 교회로 오게 하고, 교회에 흥미를 갖게 함으로써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의도나 관심이 아니라 사도 자신이 맛보고 누리고 있는 생명의 약속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재미가 있는 교회였겠습니까? 초대교회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니까 초대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그래서 재미있는 교회였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자신의 것을 다 팔아 나누고 함께 통용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과연 재미있는 일입니까? 과연 이런 교회를 원하시고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은 대단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은 힘들지 않고, 자신은 포기하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없이 재미와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섬김과 희생을 내어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내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를 원하고 사랑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곧 교회도, 사랑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향한 기쁨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이익과 재미를 위한 종교인의 모임일 뿐입니다.

 

 

 


신자는 돈 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에서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자된 것은 생명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보지 못한 기쁨이 있으며 세상이 알지 못한 세계가 있으며 세상이 맛보지 못한 가치 있는 세계가 있음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디모데와의 관계를 좀 더 친밀감이 있는 관계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약속 안에서의 관계입니다.

 

 

 


신자와 신자는 세상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지는 조건과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생명의 약속만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바울에게 디모데가 사랑하는 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생명의 약속이라는 관계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의 약속의 기쁨으로만 모인다면 그 교회는 자연히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모임으로써 훼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약속이 무엇보다 귀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에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의 약속 밖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생명의 약속 밖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약속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멸망에 있는 우리를 구출하여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심으로써 멸망의 자식인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가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강) 디모데후서 1:3-8  고난을 받으라

 

<본문>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3-8)

 

 

 


<설교>

 

8절을 보면 사도는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천국가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니 과연 이러한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의 대부분은 ‘’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어려움에 대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힘을 써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재앙을 다 막아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도는 오히려 반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과연 사도와 같은 복음을 선포한다면 사람들이 모일까요? 아마 어렵지 않겠습니까? 고난을 얘기한다고 해도 순수하게 고난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난을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토를 달아놔야 고난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난과 함께 복을 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에서 십자가는 교회 부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희망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두고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빼앗아 버립니다.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십자가 지신 예수만 믿어주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떠나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냥 고생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복음과 상관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고생으로 여긴다면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생을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고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복음으로 살지 않는 것 같은 자격지심에 빠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고난을 육체적인 고생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육체적인 고생으로 여기게 되면, 자연히 고생을 하지 않고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고난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복음을 알게 되었으면 사도처럼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이 복음을 받은 자를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환경 문제로 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기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5절을 보면 사도는 디모데의 믿음을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6절을 보면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란 5절에서 언급한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는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7절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는 5절에서 말한 ‘거짓이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거짓이 없는 믿음은 7절에서 언급한 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이 있습니다. 반대로 한다면 두려움이 있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이 없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고, 주님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실 무엇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붙들고 있고, 사랑 아래 있는 것이 신자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에 무엇이 주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주님의 사랑을 끊어 버리고 신자를 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신자에게 두려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으며 두려움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상 무엇에도 두려움이 없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긍휼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심히 감사하고 자랑해야 할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지를 못합니다. 돈이 있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 받은 자신을 마음껏 자랑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용서도 긍휼도 내어 놓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누리고 있는 것을 세상은 전혀 누리지를 못합니다. 신자가 받은 은사를 세상은 전혀 받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신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가지고 있는 돈과 힘을 가지고 자신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비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향해서 ‘너희는 돈으로 사느냐? 나는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믿음으로 산다’ 이런 당당함이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당당하게 꺼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믿음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겠습니다. 믿음을 보고 ‘부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보다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은 전혀 힘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는 존재는 이처럼 세상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을 세상 속에서 나타내고 증거할 사람으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내어 놓고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돈을 전부로 아는 사람들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믿음을 자랑하면서 부끄럽지 않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전혀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는 것을 내어 놓으면서 그것을 자랑하고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복음을 기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받은 신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살고 못사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실 뿐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십자가의 은혜와 용서를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굴하지 않고 십자가를 증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3강) 디모데후서 1:9-12  거룩하신 부르심

 

<본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후서 1:9-12)

 

 

 


<설교>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이 나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둡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으니 하나님은 내 믿음을 보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은 9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셔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부르심의 목적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부르심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합니다.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쓸만한 사람을 골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보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적어도 9절의 이 말씀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역시 인간이 은혜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거나, 간구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열심도 정성도 그 무엇도 개입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거나 행위를 비교하며 신앙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은혜를 떠나 있는 인간들의 작태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신 것이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성경은 신자의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까? 가령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신자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신자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입었는가를 구원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복을 증거하며 살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이 십자가를 증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신자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신자의 사명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합된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자기 행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원한 때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은혜대로 하신 것이라면,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말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이루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란 영원한 때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기로 하신 예수 안의 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엉뚱한 것을 은혜라며 좇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난 은혜만을 참된 은혜로 여기고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에서 은혜를 찾고 또한 원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썩어질 것임을 생각한다면 땅의 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 썩어질 땅의 것을 위해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때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가 썩어지고 사라질 땅의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세상은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영원히 썩지 아니할 기업을 받을 자로 부름 받은 것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반포자나 사도나 교사라는 것은 모두가 복음을 증거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합니다. 즉 사도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복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자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사람은 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세력에 붙들린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과 권세로도 불가능한 일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무엇이 귀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앞에서는 시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의 전부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복음을 위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위치에서도 복음을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고 복음이 증거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행실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가벼이 하는 것이며,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빙자하여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도 부요한 자, 권세 있는 자, 성공한 자를 높이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아들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사는 신자를 시시하게 보시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아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고난을 받되 부끄럽지 않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아니한 것은, 바울이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나님이 마치실 때까지 주님이 능히 지키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능력이고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4강) 디모데후서 1:13-14  아름다운 것

 

<본문>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14)

 

 

 


<설교>

세상은 무엇을 볼 때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질까요? 자연을 바라볼 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하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답다고 인정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눈과 죄에 속한 자로 전락한 세상이 세상을 보는 눈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오늘날 교회는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고 신자다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이 인간의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한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믿지 아니한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소위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을 내세워 믿음의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3,14절)고 말합니다. 본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기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상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영광을 생각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리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고상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결국 제 눈에 안경일 뿐이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말씀에서 벗어난 악한 자들의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벨탑이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바벨탑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쌓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모든 노력과 수고를 쏟아 부으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바벨탑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바벨탑이 든든하게 쌓아져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무너져야 할 것으로는 추호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든 자신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를 원수로 규정하고 대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리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선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지 내 육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선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자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과연 신자가 말씀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악함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분의 의의 공로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심판 받을 자임을 알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를 은혜로 부르셔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일을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신자가 말씀대로 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멸망의 자식에 불과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 즉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고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일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8-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에 어떤 인간의 행위도, 그것이 세상이 볼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애당초 죄와 사망의 권세에 붙들린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권세를 끊어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로부터 전해진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작정된 일이기에 내가 어떤 일을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행함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작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의 권세를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해도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끊어 버리고 우리를 구출하여 생명에 있게 합니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복음을 위해서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름을 입은 것도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5강) 디모데후서 1:15-18  사도와의 관계

 

<본문>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디모데후서 1:15-18) 
 

 

 

 

<설교>

신자는 자신의 신자 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감사가 고백되어야 합니다.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안 후, 그 은혜로 말미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신자라면 이런 감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자 됨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의 찾아오심과 부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게 되어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분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신자로 일컬으면서도 신자 됨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을 신자 되게 하신 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혹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신자 됨을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교회와 연관된 신자 됨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일을 하는 자신에게서 신자 됨을 확인할 뿐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합니다. 누구는 밭을 사서 나가봐야 하겠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해야 한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장가들었다고 하면서 사양합니다.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사양합니다. 잔치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노하여 길거리에 나가서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소경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부족하다고 하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내용을 보면, 결국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애당초 잔치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는 것은, 잔치에 오지 않으려고 하거든 붙들어서라도 집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잔치를 베푼 주인의 의지입니다.
이 경우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잔치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나같은 자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있어서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의 것을 받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고 소경이며 저는 자와 같은 나를 불러 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속에 둔 신자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15절)는 말씀처럼 사도 바울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것은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음을 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믿음과 사랑으로써 증거했던 복음을 외면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울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오네시보로입니다. 16,17절에서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던 사람이고,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 만났던 사람입니다.

 

 

 


바울을 버리는 자가 있는 반면에 바울이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나고 유쾌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단지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싫어하고 친하게 지내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버렸다는 것은 곧 복음을 버린 것이고, 찾아가 만나는 것은 복음을 귀하게 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그만큼 귀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즉 사람이 싫어서 버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좋아서 찾아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런 세상에 세상이 환영할만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환영하지 않는 복음을 환영받는 복음으로 변개하고자 한다면, 결국 세상에 환영할 수 없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고 대신 세상이 환영할만한 것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다른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그 속에 거하는 신자는 사도가 전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고자 할 것이고, 그 마음에서 말하는 복음은 사람들이 환영하든 환영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에게 복음은 귀한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났던 것입니다.

 

 

 

 

바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의 이런 마음이 바울을 유쾌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바울과 오네시로보의 관계에는 인간적 친분이 아닌 복음이 있습니다. 즉 복음으로 인한 관계인 것입니다. 복음이 강력한 능력이 되어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들고 이익이 된다고 해서 가까이 하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적 관계와 복음적 관계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들고와 상관이 없고, 내게 이익이 되고 안되고와 상관이 없고, 나에게 잘대해주고 잘대해주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복음이 좋고 귀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관계가 복음적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관계는 멀리하고 멀리하지 않는 기준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내 마음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면 가까이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복음으로 인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복음만 마음에 두고 만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만남에 유쾌함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유쾌함이 없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 등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보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만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만났을 때 여러분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으로 유쾌합니까? 그것도 유쾌함이 될 수 있지만, 교회에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복음의 교통으로 인한 유쾌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모인다면 이러한 유쾌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와 사도의 관계에 복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로 모이는 신자의 관계에도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이 모인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관계일 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기분 상하고 깨어지는 관계말입니다. 여러분께 복음이 귀합니까?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그리스도에게 말씀하는 복음이 감사하고 기쁘십니까? 그렇다면 그 속사람 그대로 성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속에 있는 신자에게는 복음을 귀히 여기는 지체를 만났다는 것이 유쾌함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8절을 보면 사도는 오네시로보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유쾌하게 하고 부지런히 찾아와 주었으니 그 대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네시보로가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온 것은, 곧 그 속에 복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보로는 이미 그리스도의 긍휼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즉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은,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나같은 자를 부르신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때부터 택하시고 예수 안에서 은혜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에 복음은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마음으로 함께 모이고 교제하고 교통함으로써 유쾌함이 있게 됩니다.

 

 

 

 

 

(6강) 디모데후서 2:1-6  충성된 사람

 

<본문>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디모데후서 2:1-6)


 

 

 

<설교>


죄로 인해서 멸망에 처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주어짐으로써 멸망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믿게 된 자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채워졌음을 고백하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현재의 형편이 어떠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총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의 사건으로 그 속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속을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총을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은총을 받음으로 자신의 허전한 속을 채움으로써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죄 용서 받은 은혜와 평생토록 건강하게 사는 것 중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둘 중 어나 하나도 포기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십자가의 피의 은혜는 신자에게는 기본적인 것이고, 세상의 복을 받아서 건강하게 살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은 추가로 주어지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믿음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갈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한 자의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100억에 당첨된 복권과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웠습니다. 이 경우 복권이 100억에 당첨된 사실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의 반응이 어떨까요? 당첨 사실을 몰랐을 때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바라보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권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당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떨까요? 수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100억에 당첨된 복권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모습은 과연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현대 기독교가 보여주는 믿음의 현실은 기뻐할 것으로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의 귀함을 알지 못하기에 사도가 배설물처럼 여겼던 썩어질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온통 자신의 삶에 매어 살아가는 모습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현실인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일컫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라는 특정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곧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하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데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참된 현실입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본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고난을 피하고 자신이 꿈꾸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빗나간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다니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것은 사도가 걸어갔던 고난의 길도 거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난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난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가 고난을 좋아해서 고의로 고난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싫어하기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세상을 다니게 되면 필히 고난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고난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이며 기쁨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다닌다고 해서 그 대가로 좋은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자녀의 출세가 약속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님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잘릴 수 있고, 병이 들 수 있고, 자녀로 속만 썩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을 기뻐하고 소원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로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은 자가 분명한 것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밖에 나가서 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모든 생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멋대로 팽개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을 먹고 사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건강하게 잘사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들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일 때 고난은 피해야 하는 불행으로만 여기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보다는 편안한 자신의 삶을 목적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군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게 되면 항상 집중하는 것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일 뿐 자신을 군사로 모집한 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두도 두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군사로 모집한 분의 기쁨도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사도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사도에게 들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탁받은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게 부탁되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날 위한 복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된 사람이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날 위한 복음이 아니라 나에게 복음을 부탁한 분을 생각하며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복음을 맡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알았으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복음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맡은 자의 모든 삶이 복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의 삶은 복음을 증거하는 그릇이 아니라 복음을 가리는 훼방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5,6절에서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경기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법대로, 즉 경기 규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경기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우승을 하였다고 해도 우승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즉 경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승이나 열심이전에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규칙을 경기하는 자가 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규칙을 정하고 자기 편한 대로 경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이 자신에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여도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기 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인 것처럼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믿음을 자기 입맛에 맞게 수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말고 오로지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질 규칙이라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복음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고난은 싫으니까 고난이 없는 길을 가겠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군사의 삶을 수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를 수고하는 농부로 빗대어서 모든 일에 목사가 먼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곧 규칙을 자기 입맛대로 수정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먼저 받고 나중에 받는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는 그때그때 어떤 대가를 받는 수고가 아닙니다. 추수할 때의 기쁨을 바라보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대가가 주어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추수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처럼 신자 역시 지금 대가를 기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주어질 추수의 기쁨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믿음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온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군사의 모습이며, 규칙대로 경기하는 자이며, 추수를 바라보는 농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고 면류관이 없는 길을 달려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이지 자신을 위해서 복음에 헌신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이 자신에게 고난만을 안겨준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복음이 증거되는 길을 가고자 힘쓰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이며 진심으로 복음을 맡은 자인 것입니다.

 

 

 

 

 

(7강) 디모데후서 2:7-13  참아야 하는 이유

 

<본문>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후서 2:7-13)

 

 

 


<설교>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복음을 맡은 자로 부름 받은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 부르신 분의 뜻이 있는 것이고, 그 뜻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복음을 맡겨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항상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써 복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위해 살아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복음이 증거될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사도는 디모데를 좋은 군사로 일컫는데, 군사는 싸움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군인의 먹고 사는 것, 즉 모든 생활은 국가가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군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가 주는 대로 먹고 마시며 생활하면서 군인다운 자로 훈련을 받아서 군인다움을 보여주면 됩니다.

 

 

 


신자가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고 살면서 신자로서 가야할 길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규칙대로 경기하는 모습이고, 추수 때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신자에게는 믿음으로 인한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나에게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쁨과 재미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하는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기쁨이 아니고 여전히 세상의 좋은 것을 기쁨의 도구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기쁨이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과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7,8절에서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라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대신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자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일하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가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총명입니다. 이 총명이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가 곧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살으신 그리스도를 기억만 해도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으로 가게 된다고 해도, 고난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죽음에 이르는 길로 가게 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알기에 얼마든지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믿음을 말했으나 얼마나 믿음과 상관이 없는 길을 갔던가를 능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로 기뻐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에서 재미와 기쁨을 누리려고 했던 우리들의 불신앙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로 기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귀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귀함에 무지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고(아무리 십자가 은혜를 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 은혜가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은혜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무지한 것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어둠에 자리에 떨어졌던 자신의 악함을 안고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추상적으로만 그리스도를 외쳤을 뿐, 어둠에 있던 인간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가슴 깊이 몰려오지 않는 것이고, 다시 살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자신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으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병 들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올 수 있다는 것으로 두려워해야 합니까? 빌립보서 4: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은, 기도하면 모든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즉 어려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 말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9절을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비록 옥에 갇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여전히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일하심을 뜻하기 때문에 사도가 옥에 갇힌 고난에 처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도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어떤 어려움에 매인다고 해서 예수님도 매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10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택한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고난과 핍박을 참는 것은 사도 자신은 택한 자를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로도 구원을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에게 매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의 뜻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고 있으며, 세상은 지금도 그분의 뜻에 복종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곧 불신앙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13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말합니다.
미쁘다는 것은 ‘미덥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즉 주와 함께 죽으면 살고 참으면 함께 왕노릇하고,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한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신뢰하는 신자라면 죽는 것도 고난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살 것이고, 고난을 참으면 왕노릇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난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주를 부인하는 것이고, 주를 부인하면 주님 역시 나를 부인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신자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도 참게 되는 신앙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일향 미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신실하신 분입니다. 신자의 구원이 가능한 것도 그리스도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에서 멀어지고 모든 일에서 참게 되고, 눈앞의 현실보다는 장차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8강) 디모데후서 2:14-17 유익이 없는 일

 

<본문>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2:14-17)

 

 

 

 

<설교>

믿음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선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아무리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지고 다른 사람처럼 열심과 뜨거움이 없다고 해도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교회에 있어서 믿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할 믿음의 근거를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 형편과 주어지는 모든 것을 믿음과 연관시켜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근심을 하게 되고,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함으로써 믿음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둠으로써 믿음으로 인한 고난에 대해서도 마치 하나님께 벌을 받는 차원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이 없는 것을 믿음으로 인한 복의 결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말을 함으로써, 신자에게 고난은 믿음에 의한 당연한 결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고난도 신자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고 말합니다. 바울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을 버립니다. 이것은 바울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의 대부분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축복으로 바꿔 버린 실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을 제공하는 복음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즉 복음의 본질 자체가 변질됨으로써 다른 복음을 복음으로 위장하여 내어 놓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능력이 없는 비복음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16,17절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은 당시 에베소에 성행했던 거짓된 복음을 말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지요. 3계명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망령되고 헛된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것이기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생명이며 빛입니다. 어둠에 붙들린 자를 해방시켜 빛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의 내용이며 본질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복음의 내용은 생명도 아니고 빛도 아닙니다. 애당초 생명이 관심이 아니고 빛이 관심이 아니며 자신의 삶이 모든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이 관심의 전부인 사람들에는 생명의 문제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욕망의 문제에만 착념할 뿐입니다.

 

 

 


14절을 보면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한 말다툼은 신화와 족보로 인해서 생겨난 것입니다(딤전1:4;4:7). 당시 교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단들의 가르침과 변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딤전 6:3-10). 바울은 당시 디모데가 시무하던 에베소 교회 내에 성행한 거짓 교사들이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그러한 변론이나 논쟁들을 금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다툼은 유익이 전혀 없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복음이 유익할 뿐이지, 인간을 잘되게 한다거나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말들은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들은 듣는 자로 하여금 생명이 아닌 망하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가 진리를 잘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변이 없다면 결국 듣기에 좋은 말, 감동이 되는 말, 위로가 되는 말 등을 무작정 진리로 여기고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입니까? 사도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진리에 충성하고 진리에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고 공로가 없어서 부끄러운 일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모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를 남겼든 상관없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씀하고,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것을 말씀합니다. 남긴 액수를 따라 차별 대우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받은 대로 일한 것을 두고 충성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행위를 구분하고 공로를 구분하고 상을 구분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망령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분변하면서 진리로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를 가르치고,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되어서 그것으로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가르치는 것들이 신자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에게서 행함을 이끌어 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스도를 은혜를 아는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익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진리에서 나오는 말과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말을 분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이 여러분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주님의 은혜만 증거합니다. 인간의 공로는 증거 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의 욕망 또한 용납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교회와 연관된 일이라고 해서 욕망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만족을 누리고, 자기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자기 욕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이 진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에만 관심을 둔다면, 진리를 위장한 인간의 욕망을 분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에 관심이 없기에 진리와 인간의 욕망을 분변치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거짓 복음일 뿐입니다. 내 욕심을 채워 주는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자 하십시오. 그러면 진리를 분변하면서 유익이 없는 일을 버리며 복음 안에서 기쁨과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9강) 디모데후서 2:18-21  합당한 그릇

 

<본문>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18-21)

 

 

 


<설교>

20절의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이 있고, 천히 쓰는 그릇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을 대할 때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공통적인 생각은 ‘나는 어떤 그릇일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으로 쓰이기를 원합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귀히 쓰는 그릇이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실 귀히 쓰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않으면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라는 것을 자신이 귀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니까 귀하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귀히 쓰신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도인 것이지 사용되는 그릇은 아닙니다. 즉 귀히 쓴다는 것은, 귀한 일에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그릇이 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하였다는 말은 자기 구원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망치를 집어 든다면 망치를 사용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망치를 위해 망치를 집어 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망치를 집어든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히 쓰는 그릇도 내가 귀하게 여김 받는 것으로, 즉 자기 구원론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만약 누구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내용으로 이해해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내용과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을 조건을 미리 내가 갖추어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쓸 만한 그릇이어서 불러서 귀히 쓰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의 내용은 자기를 깨끗케 함으로써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케 한다는 것은 무슨 경건주의나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라는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한 이런 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다른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은 피의 은혜를 바라봄으로써 용서의 은총 안에 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총 안에서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용서의 은총의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쓰시고자 하시는 귀한 일이고 신자는 이 일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귀히 쓰는 그릇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담아 주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등장하여 이것을 훼방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에 빠져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등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이단들은 영의 부활은 인정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말들이 진리를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곧 견고한 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신자는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신자는 견고한 터 위에 있기에 불의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귀한 그릇으로써 우리가 받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기 위해 진리를 분변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며 오직 하나님께서 내 속에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면 그 내용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나 공로와 같은 것들은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고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롬 9:21-23절을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세입니다.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항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나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를 만드신 뜻이 무엇입니까?’라며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릇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 인간의 힘이나 열심을 따라가지 마시고, 사나죽으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에는 더러운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직 깨끗한 것만 담겨 있게 되는 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입니다.

 

 

 


이 그릇에는 교회 부흥이나 목회 포부 등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것들이고, 그 더러운 것을 속에 담아두고 있다면 귀히 쓰는 깨끗한 그릇의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십자가 아래로 부르심으로써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자비하심과 용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속은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춤추며 기뻐하고 감사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속이 과연 이러한 상태입니까?

 

 

 


세상의 것으로 내 속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더러움에 던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속으로는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으로 그 속이 채워질 때 여러분은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강) 디모데후서 2:22-26  주의 종

 

<본문>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2-26)

 

 

 


<설교>

여러분은 자신이 신자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설마 ‘나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신자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시겠죠?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것은, 여러분의 선택도 의지도 아니라는 얘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고자 스스로 결정해서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여러분의 생각과 의지에 의한 여러분의 결정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절을 보면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도는 자신의 사도됨을 자신의 결정과 의지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의 의도는 복음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사도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사도로 세움 받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도직임을 알기 때문에 사도직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많은 사람 위에서 다스리는 것은 사도로서 분명 어긋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목사 된 것에 대해 사도와 같은 이해를 하고 있다면, 현대 교회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목사의 문제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직을 이용해서 대접받고자 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목사직을 내세워서 마치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도 않을 것이고, 목사직을 다른 신자와 구별하여 우월한 자로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을 신자로 세우셨겠습니까?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이 바울을 사도로 세운 것이고, 여러분을 복음을 아는 신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신자의 삶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자라는 존재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 취해 살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전부로 여겨서도 안 될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길을 자신의 정욕대로 결정하고 힘써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그 길로 밀어 붙이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결국 그 마음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도구다’라는 말을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왕이면 이렇게 사용해주세요’라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도구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신자되게 하셨다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서 진리에 아는데 이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가 그러한 것을 좇음으로써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는 신자에게 어떤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것이 신자이기에 신자로서 당연히 좇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은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신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기대하기보다는 복음을 좇아 행할 때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입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자로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서 그리스도의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청년의 정욕을 좇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정욕은 단지 젊은 사람들의 정욕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청년의 특징을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을 좇는 길에서는 그리스도의 것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3,24절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라고 말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인간의 자랑거리와 업적을 두고 경쟁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는 다툼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이기고자 하는 욕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업적과 자랑거리로 상대방을 누르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다툼은 필연코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종은 다투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은 흔히들 말하는 목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주를 좇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주를 좇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이 곧 주의 종입니다. 주의 종은 자신의 정욕이 아니라 주를 좇기 때문에 자신의 자랑과 업적으로 상대방과 경쟁하고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고 나타내는 것이라면 오직 주님의 업적이고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따라서 다툼은 자연히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종으로서 주님을 생각하게 되면, 신자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으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해야 할 말도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저를 위한 길이 아니고 저를 위한 말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길이고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목사직입니다.

 

 

 


물론 이 길은 저의 본성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여전히 저의 본성은 저로 하여금 제 안위를 걱정하게 하고 때로는 교회를 향한 유혹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세우신 하나님이 저를 붙잡아 제가 가야 할 길로 밀어 넣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인해서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저 역시 저의 어떤 것으로도 저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살면 편합니다. 저 역시 저의 정욕을 따라 말을 한다면 여러분의 욕망과 일치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 사람으로 세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주를 좇아야 할 주의 종으로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삶의 방향까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욕을 좇아 살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좇는 주의 종의 길을 갈 때 자연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사라지게 되고, 다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생명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으로 경쟁하고 이기고자 하는 모든 것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입니다. 주를 좇아 살기에 자연히 주를 위해서 온유하게 되고 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함으로 자연히 참게 되는 것이 곧 온유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온유로 인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 않습니까?

 

 

 

주의 종을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 역시 목사의 고유 권한이 아니라 주를 좇는 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는 교회에서의 징계도 복음을 위한 것으로 행하게 됩니다.

 

 

 

 

25,26절을 보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는 말을 하는데, 많은 경우 교회에서 행하는 징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목사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즉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목사를 비방하고 도전할 때, 교회를 위해서 또는 목사를 위해서 그 당사자를 교회로부터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거역하는 자는 징계하라고 하면서도 징계의 목적을 징계 받는 자의 회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역하는 자는 진리를 거역한 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징계하되 온유로 하라는 것은, 거역한 자의 구원을 위해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보복도 아니고 징벌도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를 거역한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유로 받으심으로써 신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거역하는 자는 징계하되 나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징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역하는 자라고 해서 그가 멸망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사 그리스도를 아는 길로 가게 하실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에게 자연스런 것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런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복음을 위한 길로 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며 주를 바라보는 것이 신자이며 주의 종입니다. 신자 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11강) 디모데후서 3:1-9  마지막 때

 

<본문>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디모데후서 3:1-9) 

 

 

 


<설교>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고,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께 소속된 모임으로써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세상과는 다른 모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생각지 않고 관심도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세계에 관심을 둔 채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단지 종교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는 세상을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건 다시 오시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닙니다.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살았던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 즉 종말의 사건은 기쁨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임할 때 세상의 형편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노아는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괜찮고 다른 사람은 안되는 것입니까?

 

 

 


물론 노아도 세상 사람과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고하신 심판을 생각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종말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다른 삶입니다.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의식이 사라졌기에 현실이 보이게 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좋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하고 돈이 함께 하는 것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고 하나 교회가 아닌 것이고 종교단체의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과연 여러분을 얼마나 긴장되게 합니까? 신자가 말세를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고 해도 말세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고 관심도 없다면 말세를 믿지 않는 자와 다를 것이 뭐겠습니까?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때가 되었을 때 참으로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야 돈이 생명인 것 같고 육신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 되지만, 종말론적 의식으로 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든 상관없이 종말, 즉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의식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 되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말세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말세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세상은 말세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고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이 곧 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삶이 어렵고 힘들어서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말세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겪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면 말세를 아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고통스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고통스러운 때는 언제입니까? 2-5절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말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과연 이러한 것으로 고통스러워합니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 자긍하는 것’ ‘교만한 것’ ‘훼방하는 것’ 등 말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자라고 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긍하지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남을 훼방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 역시도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자신의 그런 것들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신자가 말세에 대한 의식, 즉 종말론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에 소망을 둘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나의 성공이나, 자식의 출세, 재물, 그러한 모든 것들이 결코 소망이 되는 것들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절감할 뿐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희생과 봉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사랑에 매어 있고, 돈을 사랑하고, 자긍하고 훼방하고 거룩되지 못하고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한 자기 실체일 때, 결코 덤덤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에게 매인 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 애통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신자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말세의 때를 가리는 거짓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세의 때보다는 현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불평하는 길로 이끌어 가버립니다. 6,7절을 보면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인을 유혹하는 것처럼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 거짓된 교훈입니다. 거짓된 교훈의 특징은 여러 가지 욕심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은 아무리 배운들 진리에 이르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 역시 말세의 때를 살면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정체를 파악하면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말세의 때를 잊어버리고, 무엇이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여전히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거짓 교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행함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직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행함을 요구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소망을 두게 하는 거짓된 교훈으로부터 그 마음이 돌아서야 합니다. 말세의 때에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만을 중심에 둘 때,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12강) 디모데후서 3:10-17  성경의 유익

 

<본문>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0-17)
 

 

 

 

<설교>

하나님이시면서도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려죽으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2-5절)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은 참으로 기가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떳떳하게 아무렇지 않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실상 자기 사랑에 매인 모습임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 사랑과 은혜를 언급조차 할 자격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드시면서 고치시고 생명으로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크다는 고백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이 전부인 그의 나라를 구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의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의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기에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하며 아파하기 마련입니다. 의가 미워하는 것은 곧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악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의를 향한 감각이 죽어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에 대한 감각이 죽은 자의 상태와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6,7절의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는 내용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요즘 교회에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는 세미나가 성행합니다. 이 세미나의 취지는 말씀대로 살면 가정이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움으로써 인간의 실상을 발견하고 내가 부인되어지고 낮아지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길로 이르고자 함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남겨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가정 행복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교인들을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으로 만들고 목사를 잘 섬기는 추종자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남겨 놓으셨겠습니까? 왜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까? 이것이 자기 욕심으로 성경을 배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남겨 놓으신 것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가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하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자기 욕심으로 성경을 배웠다는 증거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할 일에 거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할 위치에 있는 디모데가 과연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말하지 말고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진리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속이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해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으로 하와를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로 말씀을 가볍게 여기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결국 사탄의 유혹에 불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속이는 자들이 거짓된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속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배우고 확신할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또 이런 말을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서 성경이 디모데에게 있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가정의 행복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열심도 아니고 오직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성경을 배움으로 얻은 열매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을 배움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주는 유익인 것입니다. 16,1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익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열심과 지식으로도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온전해 질 수 있는 길은 온전한 분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분의 온전함으로 인해서 온전함의 혜택을 누리는 것만이 죄인된 인간이 온전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고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 하셨음을 알게 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온전함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게 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욕심을 이루어주기 위한 도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고 듣기 때문에 성경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무엇을 배우십니까? 아니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이 여러분에 어떤 유익을 주기를 원합니까?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마음을 두고자 하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 섭섭함을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는 것보다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요?

 

 

 

 

 

(13강) 디모데후서 3:15-17  성경

 

<본문>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

 

 

 


<설교>

신자는 성경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는 자로 오해를 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사건들, 즉 기적을 여러분은 모두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의 기적들은 단지 자연 현상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처럼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홍해 사건을 믿고 오병이어를 믿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사실 그대로 믿는 여러분과 단지 자연현상을 신화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들을 사실 그대로 믿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성경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합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이 이런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기록된 것이겠습니까?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나눠주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다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의 떡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안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성경을 배우고 읽는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인 것이지 단지 성경에 있는 기적의 사건들을 의심 없이 믿게 하기 위해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성경의 어떤 기적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일까? 아닐까?’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의 관계에 붙들리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에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도 구원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육신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게 되면, 욕망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구원의 지혜에서는 멀어진 채 성경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수준에 있으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사실로 믿는다고 해도 기적을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세워 놓기 위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로 붙들어 놓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면서 말씀을 대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이면서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자비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은 간절함이 없는 것이고, 아예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성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이미 세상에 빼앗겨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간절함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여전히 인간의 실상에 대해 무지한 것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는 다만 자신의 인생을 꽃피우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관심을 끌만한 열심과 행동이 중요한 것이지 구원의 지혜를 얻게 하는 성경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구원의 지혜를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는 행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17절을 보면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향한 중심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잘못됨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신자로 고침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고치는 능력이 되기를 소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우대하고 높이는 사람 되는 것을 꿈꾸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 바르게 되어 가고 고침 받고 새롭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 자신들은 신자 됨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취미생활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좋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께 좋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원하시는 무엇인가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신 것입니까? 신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좋으신 분으로 다가올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말할지라도 실제 그 마음에 좋은 것은 따로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루 먹고 사는 것으로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하지 않지만, 신자는 하루 먹고 사는 것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좋으신 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신자는 성경으로 말미암아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은 여러분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교육하면서 온전한 자로 고쳐갈 것입니다. 이런 신자로 고침 받기를 소원하면서 이것을 위해 서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크나큰 능력으로 우리를 장악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날마다 고침 받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14강) 디모데후서 4:1-5  네 직무를 다하라

 

<본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후서 4:1-5)

 

 

 


<설교>

디모데후서 4장은 사도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바울에게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기는 유언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6절의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관제는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러한 관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가 모두 부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을 위해 모두 쏟아 부어진 상태로 바라보는 심정으로 4장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1절)

 

 

 


엄히 명한다는 것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이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이처럼 엄히 명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울의 말은 결코 가볍게 넘길 내용이 아니며, 바울의 말 대로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것도 아니라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신이 남기는 말을 두고 엄히 명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단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평생을 두고 걸어가야 할 인생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길은 신자로서 필히 가야하는 길이기에 엄히 명한다는 말로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과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의 권위가 어떠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나라에 참예할 자와 영원한 사망에 처할 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가 나아가야 할 정당한 길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엄히 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즉 디모데가 바울이 말하는 삶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굳이 엄히 명하지 않아도 신자라면 신자가 실천해야 할 부분이라고 인정을 할 것인데 왜 엄히 명하는 것입니까? 단지 전도에 힘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신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에서 전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고 예수 믿게 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고 사명이라는 말을 교회가 아주 많이 강조하였기 때문에 말씀 전파, 즉 전도는 신자라면 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엄히 명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전도하는 것을 신자가 하지 않으면 안될 엄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교인들을 교회밖으로 내 보며 사람들을 전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전도에 대한 사명을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씀 전파하는 것은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말씀전파는 오래참음으로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에 대해 경책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경책과 경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자신을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요즘 교회가 말하는 전도는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교회로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사람을 경책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사도가 말하는 현대의 실상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귀는 진리에서 멀어져 있고, 다만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자기 욕심을 옹호해주는 말을 교훈으로 받아들입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생명이 없는 허탄한 이야기를 즐겨하고 좇는 것이 현대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욕망을 파헤치며 모든 악한 것과 허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을 엄히 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싫어하고 듣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즉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거부를 받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참음이라는 말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왜 고난이 있습니까? 말씀을 전파하면 고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히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디모데의 교훈을 거부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그러한 배척과 고난을 받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하는 교회가 바른 교훈으로부터 귀가 멀어져 있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고 지금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갈 1:8-10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곧 저주와 연결됩니다. 그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가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이며,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나 따르는 자는 생명과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 4: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며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가 곧 심판을 받아야 할 자임을 철저히 알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경책하고 경계하며 부끄럽게 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디모데의 직무이며 우리의 직무인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가지고 일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전도인의 직무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자신부터 나를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인의 직무에 힘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이 말씀에서 먼저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진심으로 원하고 사모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15강) 디모데후서 4:6-8  선한 싸움

 

<본문>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6-8)

 

 

 


<설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합니다. 말씀 전파를 엄히 명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의 세상 현실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현실이 이러한 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좇지 않는다는 것은 교훈 자체를 거부하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교훈을 받아들이지만 바른 교훈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옹호하는 다른 교훈을 좇는 이가 많은 현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외면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라는 의미로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 앞과 예수 앞과 나타날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할 정도로 심각하게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촉구하고 권면하는 것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현실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직무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인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사도에게 있어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른교훈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력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돌이 날아온다고 해도 바른 교훈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사도에게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를 하고 살아가는 신자에게 선한 싸움을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태 속에서 바른 교훈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대와 공격을 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선한 싸움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인의 일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에게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을 받고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것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도 말씀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자신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증명한 것이 곧 바울이 믿음을 지킨 것이었고, 예수님을 만난 후로 평생을 달려온 길이기도 합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1:11,12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진리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굳게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부름 받은 신자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 할 것 없이 말씀만 전파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고 선한 싸움에 참여된 신자입니다.

 

 

 


고린도전서 2:3-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떤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말,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의 다른 것은 절대 설교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혹시라도 인간적 지혜가 드러날까 굉장히 신경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사실 그도 자기 지혜로 전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목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사람들을 좋게 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 추종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그것을 교회 안에서의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파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추종자를 계산한다면 이미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가장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혹시 강단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교인 수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보려고 세상적 수단을 동원해 보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전도를 주관하는 이도 성령님이시며 인간의 말은 단지 그 복음과 능력이 전해지는 통로일 따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태여 교회 성장 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할 필요 없이 십자가만 전하면 된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을 늘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몫일 따름입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가 말씀 전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선한 싸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큰 교회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이 목사로 하여금 바른 교훈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는 오늘 날의 목회자가 염려하는 것과 판이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유명 목사의 설교를 이곳저곳에서 짜깁기해서 자기 것인 양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심지어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자도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성령의 힘, 아니 심지어 자신의 지혜도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려서 전합니다.

 

 

 

 

나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교회 안에 자기 추종자 그룹을  만드는 일에 노력합니다. 교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위해선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사도로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는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이 자기 말을 너무 잘 따를 때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십자가 복음만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로 열렬 추종자 그룹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신자들이 진정으로 목사보다 예수를 더 따르고자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의 지혜를 예수와 십자가라는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전한 것일 뿐입니다.

 

 

 


8절을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바울이 달려간 길에만 예비되어 있습니다. 즉 다른 길에는 의의 면류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실 뿐입니다.

 

 

 

 

인간을 육체대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인간의 공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이 나타나심을 사모하면서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바른 교훈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며 의로우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말씀을 원할 것입니다.

 

 

 


말씀은 목사에게도 신자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를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굳은 마음이 신자를 선한 싸움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말씀에 대해 이런 마음인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16강) 디모데후서 4:9-18  바울을 버린 사람

 

<본문>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디모데후서 4:9-18)

 

 

 


<설교>

누군가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말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는 의미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설사 그 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길이라고 해도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헌신의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믿음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는 수단도 방법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그러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의 말년이 어떠합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평소 바울을 흠모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그 업적에 대해 칭송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아래 죽는 것이 아니라 옥에 갇혀서 외롭고 쓸쓸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믿음에 이끌림 받았던 사도의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인생에는 무엇하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담겨있지 않습니다. 대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결과만을 바라보며 바울을 위대하다고 하고 흠모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서 모진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고난은 담겨 있지 않고 인간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사도의 위대한 업적에 있었던 것입니다. 쓴 것은 뱉어 버리고 단 것만 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붙들려 살았던 바울의 인생은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고난으로 인도받았음을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본문을 보면 바울의 곁에는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10-11절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바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받는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 마음이 없어서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신령하고 위대한 일생을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바울의 마지막은 이름도 빛도 없이, 모든 사람이 바울을 떠나간 가운데 외롭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예수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남발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고, 사도 또한 어떤 길을 갔는가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인간의 욕망만 만족시키고자 하는 허황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들여서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욕망의 단체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세상의 복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상상해 낸 하나님일 뿐입니다.

 

 

 

교회가 증거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이끌어 간 사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길로 인도 받는다고 해도 순종해야 할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통해서 누가 과연 예수님을 목자로 바라보고 예수님만 좇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옥에 갇혀서 쓸쓸히 죽음을 맞고 있는 바울 앞에서도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은 결국 바울 당신은 예수를 잘못 믿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13절의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는 내용을 보면, 세상을 떠나는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것,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떠날 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옷 한 벌과 예수님을 소망하는 믿음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토록 세상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결국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7,18절을 보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주께서 자신의 곁에 계시며 자신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강건케 하신 것은 바울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세워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일하시고 붙드시고 강건케 하시는 분이시지 우리 개인의 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심으로써 전도의 말씀만 온전히 전파되게 일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면서 그리스도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일을 첨가해서는 안됩니다.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예수님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꿈꾸고 원하는 예수일 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때에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교회 하나를 크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버리고 바울을 떠나는 현상만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서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만을 꿈꿉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에 관심이 없고, 사도 바울을 얘기하면서도 사도가 갔던 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과연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모든 관심은 주님이 행하신 은혜의 일에 두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이 우리에게 어떤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고자 하는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가 이 믿음에 붙들려 인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믿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회 안에서 몸의 관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나의 편함보다도 지체의 아픔과 힘듦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헌신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증거하는 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며 천국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에게는 삶의 방향과 중심이 분명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도 사도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천국을 향해 있다면 자연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삶의 방향을 선명하게 세우고 사도가 갔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17강) 디모데후서 4:19-22  형제의 문안

 

<본문>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 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디모데후서 4:19-22)

 

 

 


<설교>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관계로든 사람을 만나고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부딪히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은 내 마음대로, 내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골라가며 관계를 맺고 교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제력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워하는 사람은 미운 마음 그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운 마음을 간직한 채 안 그런 척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위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모임을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체라고 부르며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는 참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교회를 ‘형제’의 관계로 말할 때 우리의 감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너는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형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로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우리는 나의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형제의 관계에 순종해야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감정이 다스려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여러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게 사도에게는 본문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몇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 집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또한 에사드로와 드로비모라는 사람의 행적을 언급하고,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라는 사람의 이름도 언급을 합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에게 기억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바울이 기억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신앙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라는 사람도 바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해를 입힌 나폴레옹이란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해를 입혔다는 것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5-18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 당시에 바울에 대한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인데 좋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기준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복음을 기준으로만 바라봅니다.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하던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냐며 바울은 다만 그것으로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누구라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신앙이 있는 자로서의 너그러움을 보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핍박했던 사람들도 형제로 일컫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바울에게 친분이 있거나 평소 바울에게 잘해줬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문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기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께 기억된 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이름을 부른다면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신자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눅 10:20절을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계 20:15절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안고 있는 그 마음으로 형제들을 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자로 바라보게 되고,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이며 형제 사랑입니다.

 

 

 


설령 누군가의 나쁜 점만 보여서  불쌍한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나에게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나라고 해서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깨우침이 있을 때에 문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달음이 있게 하기 위해서, 즉 진실한 신자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서 교회 안에도 일부러 가시를 심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이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로 다 같이 불완전하며 연약한 존재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형제의 관계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형제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실체를 그대로 내어 놓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와 간섭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달라거나 그들이 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영적인 유익과 깨우침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형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분쟁만 일삼고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큰 문제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당장 그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보다 우선에 교회 안에는 알곡과 죽정이가 반드시 함께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부터 하셔야 합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아예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그들도 전도가 필요하며 복음이 필요한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전도하러 교도소까지 찾아가고 사랑으로 대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외면하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오직 생명의 문제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데는 ‘’가 기준이 되면 안됩니다. 다만 다함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연약한 자로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관계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 또한 연약한 자임을 날마다 되새기면서, 이런 나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생각하시고 다함께 그 기쁨을 누릴 자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