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욥기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욥이 오히려 그 어떤 악인조차도 당하지 않은 혹심한 고난을 겪는 모순된 현실을 두고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욥과 욥의 친구였던 당대의 지혜자 들이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며 벌인 긴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논쟁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등장하여 절대 초월자로서 창조자이신 자신만이 전 우주와 역사에 대한 절대 주권을 홀로이 가지신 바 이를 피조물이요 유한자인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도 또 관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전 우주적 스케일의 각종 소재를 동원하여 선언하셨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절대 신뢰와 순종이 필연적이며 또한 그럴 때만이 인간 실존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음을 강력히 암시함으로써 욥의 고난에 대해 간접적이지만, 그러나 이런 당장의 고난의 문제를 넘어서 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주시며 변론을 종결시키신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앞서 벌이는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 사이의 변론의 차이점을 인격적인 면, 방법론 적인 면 그리고 신학적인 면에서 간략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변론을 구분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인격적인 면과 변론의 특징을 각각 살펴본다.
[ 엘리바스의 변론의 세부적인 특징 ]
엘리바스는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정금이시다” 혹은 “하나님은 심판자 이시다”라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학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논증의 특징은 경험적 지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의 인품은 다소 동정적인 모습도 보이기도 하며 그의 변론의 논조는 다분히 철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죄를 지으면 고난을 당한다”는 논지로 욥에 대하여 “악한 자만이 고난을 당한다”고 훈계를 한다.
이러한 그의 사고를 근거로 그의 신관을 살펴보면 엘리바스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악한 자를 징계하고 선한 자를 복 주시는 의로운 하나님”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다음은 엘리바스의 변론의 특징을 열거한 것이다.
1. 고난의 원인이 죄에만 있다고 봄 (4:7~9)
2. 근본이 불투명한 환상과 같은 주관적인 체험을 근거로 변론함 (4:12~21)
3. 주관적 체험인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권위를 갖는 것으로 말함 (4:12)
4. 자신이 경험한 바가 곧 진리의 전체인양 과장하여 말함 (5:1~7)
5.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세속 인과응보론으로만 설명함 (5:9~16)
6. 전통적인 도덕률에 근거하여 변론함 (15:17~19)
7. 욥의 고난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지 못한 체 거듭 회개만을 촉구함 (5:17~27)
[ 빌닷의 변론의 세부적인 특징 ]
빌닷의 이름은 뜻은 “논쟁의 아들”이다. 이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듯 그는 전통, 전승을 중히 여기는 역사가나 법률가의 이미지를 많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다분히 역사적인 논조로 변론을 하면서 논쟁적인 모습을 함께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닷은 “고난은 틀림없이 죄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욥에게 “악한 자는 항상 고난 가운데 있다”고 훈계를 한다. 이러한 빌닷의 신관은 “확고 부동한 입법자이며 심판자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의 변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의 공의를 인과응보론으로만 설명함 (8:1~7)
2. 악인은 벌을,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철저한 흑백논리를 내세움 (8:13;20)
3.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승에 근거하여 변론함 (8:8~10)
4. 자연 현상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함 (8:11~19)
5.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욥을 비난함 (18:1~4)
6. 욥에게 독설로 저주함 (18:7~10)
7. 하나님과 인간을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인격적 관계에 있음을 알지 못함 (25:1~6)
[ 소발의 변론의 특징 ]
소발은 “거친” 혹은 “지저귀는 자”라는 이름을 뜻을 갖는다. 그는 도덕가나 독단적 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그의 논증의 근거는 가정이다. 다소 거칠고 둔한 모습을 느끼게 하는 소발은 인습적인 분위기로 현재 “우리는 죄를 짓고 있다”라는 논지로 욥에게 “악한 자의 생이 짧다”라는 것을 훈계한다.
이 소발의 신관은 “굽은 것을 곧게 하시는 철저한 하나님”임을 믿고 있으며 그의 변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불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함 (11:4~6)
2.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교리적으로만 설명함 (11:7~11)
3. 욥에게 직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함 (11:12~20)
4.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거, 변론함 (20:2~4)
5. 하나님의 공의만을 강조하고 사랑은 도외시함 (20:27~29)
[ 엘리후의 변론의 특징 ]
다소 이지적인 신학자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다. 그는 젊은이답게 교육을 통한 논증의 근거를 보이고 있으며 예민하고, 분을 내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젊은 사람의 혈기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논조를 보면 약간의 교만감도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
따라서 그의 논조는 논리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교훈하신다”는 논지로 욥에게 “겸손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훈계를 한다. 이 엘리후의 신관을 그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자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훈련자 이시며 교사이신 하나님”이시다. 엘리후의 변론이 다른 세 친구와 다른 점은 그의 변론은
첫째로 그가 철두철미하게 욥에 대하여 동정을 갖고 그 변호자로써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세 친구들에게도 노를 발하는 모습(32:3)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다.
둘째, 엘리후는 총명(지혜)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사람에게 타고난 것이라고 설명한다.(32:8) 따라서 지혜로 불리워 질 때 까지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또 완숙해 지도록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욥은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8:28)
셋째, 이러한 엘리후의 변론 역시 그의 지나친 자신만만함과 작은 교만은 그의 논지를 입증 하는데는 실패한다.
넷째,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논쟁에 임한다.(32:2~5) 이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의 표출이다. 욥이 의롭다 함을 보고 그는 분을 냈으며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도 욥의 질문에 대답할말을 하지 못할 때 분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노는 그 자신이 하고 있는 지금의 변론 자체도 온전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섯째, 이러한 엘리후도 욥을 변호한다고는 하지만 욥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후의 모습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변론에서 기여한 바는 하나님은 인간의 훈련과 징벌을 목적으로 고난을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3:14~30;37:13)
이것은 엘리바스의 변론과 비슷하기도 하지만(5:17) 젊은 그가 변론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인본주의적인 모습을 벗어난 말이기도 하다. 사실 1장과 2장 서문에서 이미 욥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고 또 욥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자신의 고난의 모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잃지 않고 있는데 엘리후의 이 말이 욥에게 커다란 위안은 되지 않았을 지라도 인간으로서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위로한 말치고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엘리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모습을 그 세 친구와는 다르게 신본주의적인 모습을 가지고 변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변론을 함으로서 전통과 경험, 이성을 통한 가정을 중심으로 변론하는 세 친구의 모습과는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다음은 엘리후의 변론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요약한 것이다.
< 장점 >
1.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변론하려 해서는 안됨을 강조함 (33:13~18)
2. 인간의 구원은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음을 강조함(33:24~30)
3.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연단을 위해 주신 것임을 강조함 (33:29~30)
4.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를 절대적인 공의에 의해 섭리하심을 강조함 (34:10~15)
5.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음을 강조함 (35:1~8)
6. 자연 현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함 (36:1~37:18)
< 단점 >
1. 고난중에 있는 욥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음 (35:8)
2. 욥이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잃지 않았음에도 신앙을 버린 양 정죄함 (36:17~23)
3.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이해하긴 했으나 욥의 고난 자체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함
III. 결 론
결론적으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변론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변론을 시작하였지만(2:11) 엘리후는 선지자적 사명으로 진리 수호을 위해 변론하기 시작하였다.(32:18~22) 따라서 이들의 방법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데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독단적, 인본주의적인 인과응보적 논리로 욥을 정죄하였지만 엘리후는 욥 스스로 자신을 살피도록 유도를 하였다.(33:5~7)
이들은 변론 과정에서 역시 다른 태도를 각각 보이는데 욥의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데 대해 노하였지만(18:7~10) 엘리후는 욥이 반박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33:32) 변론의 근거를 살펴 보면 세 친구는 환상(4:12~21)과 전승(8:8~10)으로 변론을 주로 하였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바른 통찰력(33:13~33)을 근거로 하였고 세 친구는 고난은 죄의 결과임을(4:7~11) 입증하는데 주력한 반면 엘리후는 고난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한 것임을(33:19~30) 밝힌다.
그러나 이들은 고난의 해결책으로 모두 회개를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2:21~30;34:31~32) 이들 모두에게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역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다.아무리 그들의 말과 변론이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며 죄로 오염되어진 인간이기에 신이신 하나님의 그 모든 계획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세 친구가 갖는 한계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하고 감정에 치우친 반면 엘리후는 자기의 주관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함에 있다.(34:7~9;33) 이 논술을 통하여 두 가지를 개인적으로 고난에 대하여 깨닫는다.
첫째는 고통의 첫째 이유는 보다 큰 고통을 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는 어떠한 고통이 우리에게 임한다 할 지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모두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이 논술을 통해 깨닫기를 원한다.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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