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스크랩] 남북 왕조사

옹기장이 2014. 10. 20. 12:12

남북 왕조사

 

 

 

 

  이스라엘 통합왕국(首都: 사마리아)은 사울(B.C1020~B.C1000), 다윗(B.C1000~B.C961), 솔로몬(B.C961~B.C922)까지이며, 이후 분열(分裂)왕국은 南유다(B.C922~B.C587, 335년간), 北이스라엘(B.C922~B.C721, 201년간)이다.

 

  분열 왕국의 역사는 히브리 성서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열왕기상 12:21∼열왕기하 25장)에 주로 나온다. 남유다 왕조의 20명의 왕들과 북이스라엘 왕조의 19명의 왕들, 총 39명의 왕(다윗과 솔로몬을 합치면 이스라엘의 왕은 총 41명이 된다.)에 관한 동시대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쓰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는 일정한 표현과 형식들로 표준화하여 작성되어 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연대기를 사용하고 있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또는 '~세에 왕이 된 ~' 등의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열왕기상 15:9, 25, 33 등).

이러한 역사 서술 방법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기와 비교하며 읽을 경우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법은 서로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봄, 니산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 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 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남유다에서는 아시리아의 계산법을 따라 가을, 티슈리 월을 새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둘째, 왕들의 행적과 진술(陳述)에 대한 평가는 왕의 치적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내려졌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기원전 7세기 남유다의 16대 요시야 왕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써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내려진 결과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에 불과 140여 절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이는 솔로몬의 40년 통치에만 162절을 할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3대 히스기야와 16대 요시야 왕만은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結語)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 왕의 실록'이,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이스라엘 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언급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음은 매우 유감스럽다.

 

 

●같은 왕 이름(남,북): 유다 5대왕(여호람,요람)=이스라엘 9대왕(여호람,요람)/ 유다 6대왕(아하시야)=이스라엘 8대왕(아하시야)/ 유다 8대왕(요아스)=이스라엘 12대왕(요아스,여호아스)/ 유다 17대왕(여호아하스)=이스라엘 11대왕(여호아하스)/
 

 

◆ 北 이스라엘의 역사(왕상12장~22장, 왕하1장~17장)

  세겜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이스라엘은 유다에 비해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군사력에 있어 남유다를 훨씬 능가했다. 다만 옛 지파 동맹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동질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으며, 지리적 여건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왕조의 정당성과 이념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국내 정세는 불안정하였다.
 
 

 


①여로보암1세-②나답-③바아사-④엘라-⑤시므리-⑥오므리-⑦아합-⑧아하시아-⑨여호람,요람-⑩예후-⑪여호아하스-⑫요아스,여호아스-⑬여로보암Ⅱ세-⑭스가랴-⑮살룸-⑯므나헴-⑰브가히야-⑱베가-⑲호세아
 

 

    北왕국 이스라엘(B.C922~B.C721, 首都 사마리아)은 209년(B.C.931~B.C.722) 동안 ‘아홉 王朝 19왕’이 역성혁명(易姓革命), 이신벌군(以臣伐君)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달려감. 주전722년 19대 호세아 왕 때 앗수르왕 사르곤2세(주전722~705년)에게 멸망당함. 

 


1대(①여로보암 왕조-②둘째 아들 나답)

2대(왕위 찬탈한 ③바아사 왕조-④아들 엘라)

3대(⑤엘라의 신복 장군 시므리 왕조)

4대(⑥오므리 왕조-⑦아합-⑧아하시야-⑨여호람)

5대(⑩예후 왕조-⑪여호아하스-⑫요아스-⑬여로보암2세-⑭스가랴)

6대(⑮살룸 왕조)

7대(⑯므나헴 왕조-⑰브가히야)

8대(⑱베가 왕조)

9대(⑲호세아 왕조)
 


  

  기원전 925년 솔로몬 사후 등극한 여로보암 왕으로부터 721년 아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할 때 마지막 왕인 19대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약 209년을 유지해 온 북이스라엘 왕조는 모두 19명의 왕을 낳았다. 4대 오므리 왕조와 5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치 기간이 짧았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 등 비교적 불안정한 파란의 역사를 겪었다. 구약 히브리 성서는 대부분 이들 왕들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
 

 

▶ 열왕기상,하

(1)머리부분(왕상1장~15장): 왕국의 분열

솔로몬의 통치((B.C961~B.C922): 통치(왕상1:1~11:43)

나라가 갈라짐(왕상12장~15장)  

(2)몸통부분(왕상 16장~왕하15:12): 아합왕,엘리야,엘리사 중심의 왕사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아합)와 예후왕조  

(3)꼬리부분(왕하14~왕하 끝):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멸망

북 이스라엘의 멸망(왕하14~17장)

남방유다와 꼬리부분 요약(왕하18~25장 끝)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
 


  ●①여로보암1세 Jeroboam(B.C922~B.C901)(왕상 12장~14장/22년재위):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 세워졌다. 이 반란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의 소행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이 사건은 지파 동맹 시대부터 내려오던 남북 간의 구(舊) 동맹 관계가 깨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 간의 갈등이 재현된 것이었다. 솔로몬이 죽자, 쿠데타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집트로 피신해 있던 여로보암 1세가 돌아와 민심을 장악하고 세겜을 수도로 정하여(열왕기상 12:25)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였다. 그는 즉각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상을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열왕기상 12:27~30).

그는 사제 계급인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으며, 절기의 날짜(달력)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열왕기상 12:31~33). 이러한 종교적 개혁 조치는 남유다로 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합법성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유다와의 관계는, 영토의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여로보암은 느밧의 아들로,  에브라임 족속의 스레다 지방사람인 편모(스루아)슬하에서 자람. 솔로몬 왕 때 요셉족속의 간역관(看役官)으로 눈에 띌 만큼 ‘큰 용사라‘(유능한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 아내18명과 첩60을 취하여 아들28명과 딸60을 낳음.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더 사랑함.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손을 들어 통일왕국의 솔로몬을 대적하여 주전931년에 분열왕국으로 찢어 나누고, 조공 바치던 번왕들이 조공을 거절하여 에돔의 왕자 하닷(다윗과의 에돔 전쟁 때 작은 아이로서, 애굽의 바로는 그를 맞아 자기의 처제(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를 아내로 삼게 함)을 일으키고, 수리아의 르손(다메섹 남쪽 소바의 왕 하닷에셀을 배반하고 도망 나옴)이 수리아를 점령하고 왕이 되어 대적하고, 국내에서는 실로사람의 선지자 아히야의 열지파 왕이 된다는 예언을 따라 여로보암이 모의를 꾸미다. “여로보암의 죄“ 혹은 ”여로보암의 길“이란 말은 그 아들(아비야, 나답)이후로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죄의 형태를 반복한 것을 지적함. 요새화된 세겜에서 왕도를 길르앗 땅 부느엘로 옮기고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신으로 우상숭배한 애굽의 아피스(Apis)혹은 프타(ptah) 같은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서 섬기게 하고, 아무 족속사람이라도 보통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고, 유다 절기와 비슷하게 새 절기(이스라엘 사람의 티슈리, 성력으로 제7월, 민력으로는 첫째 달에 대속죄일, 나팔절(티슈리 첫날로 ’로쉬 하샤나’ 곧 연시일(年始日), 일년에 3차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초막절)중 초막절이 들어있다)로 7월15일의 초막절을 본 따서 한 달 뒤인 마르케쉬반이라는 달, 제8월 15일을 새로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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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나답 Nadab(B.C901~B.C900)(왕상14:20, 15:25~32/2년재위): 

여로보암의 아들인 아비야는 병사하고 나답이 즉위함. 바아사 왕조는 20년간 모두 3차례나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세습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력적인 권력다툼과 내정의 불안정이 이어졌다.  여로보암의 아들인 나답의 이스라엘 주력군이 남방 깁브돈(Gibbethon, 블레셋 국경지대로 단 지파가 제비뽑은 성읍으로 레위 사람들의 성읍으로 만들어주었다)을 탈환코자 포위 때 신복 바아사(잇사갈 족속의 아히야의 아들)가 모반하여 진중에서 나답을 죽임.

...............................................................................................................................................................●③바아사 Baasha(B.C900~B.C877)(왕상 15:33~16:7/2년재위):

아히야의 아들. 잇사갈족속. 남유다의 왕 3대 아사가 통치하던 때, 북이스라엘의 3대 바아사(2년재위)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아사 왕은 다마스쿠스의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벤하닷은 갈릴리 북부 지역을 정복하였다(열왕기상 15:16~22).유다 왕(아사)의 조공을 받은 아람 왕 벤하닷의 공격으로 디르사에 거함. 블레셋 땅 깁브돈에서 모반하여 나답을 죽이고 다르사에서 왕이 됨. 선왕조(先王朝)를 이신벌군(以臣伐君)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 , 왕위찬탈의 효시가 됨.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일어남. 그는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나답 일가를 멸절시킴. 이는 패역한 이스라엘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신속하게 집행된 것임. 선지자 예후(하나니의 아들)가 바아사 가문을 꾸짖다. 디르사에서 장사됨.

④엘라 Elah(B.C877~B.C876)(왕상16:8~14/2년):

바아사 왕의 아들, 잇사갈 족속인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된지 1년만에 혁명으로 디르사에서 시해됨.

..............................................................................................................................................................●⑤시므리 Zimri+디브니 Tibni(B.C876)(왕상 15:15~20/7일재위):

엘라 왕의 신복 노릇하던 시므리는 병거의 절반을 관할하는 군대장관(친위대장)이 모반하고 디르사에서 7일간 왕위에 있음. 시므리의 반역소식을 듣고 군사령관인 오므리를 추대해서 왕으로 삼고, 궁중에 있는 시므리를 토벌하려고 당시 수도인 디르사(세겜의 동북쪽에 에발산 북쪽 모퉁이아래, 여로보암1세~오므리에 이르기까지 약40년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됨)로 북행하여 왕궁 위소로 가자 시므리는 궁중 내부 위소인 고탑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스스로 타죽음. 7일 사이에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켜 신속 처리했다. 이스라엘역사에서 2년만에 세 왕이 교체되는 비운을 낳음. 수도에서는 그만 시므리가 엘라 왕을 모반했던 적이 있다. 이번 깁브돈 공략 때에는 엘라 왕이 직접 깁브돈까지 내려가서 지휘하지 않고 왕궁에 있었는데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먹고 마시며 취해 있을 때 엘라의 신복 시므리가 왕을 시해. /디브니는 왕으로 삼으려 했던 자로 오므리의 부대가 깁브돈에 원정중일 때 디르사에 남아있던 다른 부대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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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오므리 Omri(B.C876~B.C869)(왕상 16:21~28/12년재위):

군대지휘관, 디브니와 오므리로 두패 갈림.

군은 자기네가 추대한 오므리 편에, 군 외의 다수 민간인들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으므로 둘로 갈려서 내란이 4년이나 계속되어 오므리 왕 5년에야 통일되었다. 오므리는 12년 재위 중 6년은 디르사, 나머지 6년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아 살았다. 깁브돈에서 진을 치고 군대를 지휘하고 있을 때 시므리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수도 디르사를 행 24년 전에도 바아사가 24년 동안 왕 노릇하고 죽은 이듬해 다시 군대를 깁브돈으로 보내서 공략하도록 했을 때 사령관이 오므리였을 것이다.

시므리의 왕위찬탈에 불복하고 오므리를 왕으로 세운 이유 세 가지는 1)시므리가 하위계급출신이고 2)엘라와 그의 모든 친족과 친구들까지 살해했으며 3)오므리는 왕 다음 가는 지위에 있었기에(왕하4:13, 삼하5:8, 19:13, 20:23).

 


1) 1868년 요르단 왕국의 디반(Dhiban)에서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비문(Moabite Stone 또는 the Stele of Mesha)에 따르면, "오므리는 마데바의 모든 땅을 점령하였으며, 이스라엘은 그 안에서 오므리의 통치 기간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통치 시대인 40년간에 걸쳐 거기 머물렀으나, 그모스는 나의 기간에 거기에 거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메사는 오랜 기간 이스라엘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모압을 해방시킨 군주로 등장한다. 높이 70㎝의 이 비문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6대 오므리는 4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열왕기상 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상아궁을 건설하고 천도하였다(열왕기상 16:24, 22:39). 페니키아, 다마스쿠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왕성한 무역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cf. 열왕기하 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으로 표기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쳤다.1)

 

 오므리 왕조는 북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렸으며, 6대 오므리에 의해 착공되고 그의 아들 7대 아합에 의해 완공된 수도 사마리아는, 고고학 발굴 결과가 밝혀 주는 대로 탁월한 기술과 화려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또,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므깃도의 마병장에서 발굴된 구유와 말을 묶어 두던 돌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 “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Shemer)에게서 사마리아산(hill of Samaria)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Samaria)라 일컬었더라”(왕상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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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아합 Ahab(B.C869~B.C850)(왕상 16:29~22:40/22년재위):

오므리 왕의 아들, 6대 오므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7대 아합 왕은 기원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기원전 858~824년)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도 크게 격상되었다.2)
 


2) 살만에셀이 부조되어 있는 모놀리스 비문(Monolith Inscription)에 따르면,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여러 왕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살만에셀에게 대항하여 그의 진군을 오론테스 강변의 성읍 카르카르 근방에서 저지하였다. '이스라엘의 아합'도 연합국의 일부로 파병하였다. "나는 그의 왕의 관저를 카르카르에서 부숴 버리고 허물었으며 불을 질렀다. 다마스쿠스의 하다데제르의 1200대의 전차, 1200명의 기병들, 20,000명의 보병들, ······ 이스라엘의 아합의 2000대의 전차들, 1000명의 보병들, ······ 그는 이러한 12명의 왕들의 도움을 이용하였다."(Ancient Near Eastern Text 278~279)
 

 
 부친 오므리가 천도한 사마리아에서 22년 재위. 아합 왕은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열왕기상 22:39), 이세벨(시돈왕 엣바알의 딸)로 아내를 삼아 바알의 제단(altar for Baal)과 아세라 목상(Asherah pole)을 숭배함(열왕기상 16:31), 아합 별궁이 있는 이스르엘의 나봇(Naboth)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열왕기상 21:1~16). 
 
 


3)셈어로 바알은 '주인' 또는 '소유주'라는 뜻이다. 고대 서부 셈족에게 잘 알려진 농경 신이다. 기원전 3000년경에 고대 근동 텍스트에 나오기 시작하나, 바알의 현저한 역할이 잘 알려진 것은 기원전 약 1250년경 우가릿 문학에서이다. 바알은 다곤의 아들과 동일시되고 있으나, 가나안 만신의 우두머리인 엘(El)의 아들로 잘 알려져 있다. 우가릿 텍스트에 나오는 바알의 배우자이자 누이인 아낫(Anat)은 히브리 성서가 말하는 아세라 또는 아세롯과 연결된다(열왕기상 16:33). 고대 근동에서 바알은 태풍의 신, 구름과 천둥과 비의 신으로 등장한다. 건조한 기후 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알은 농경 신, 즉 비를 주는 풍요 다산의 신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유목민의 신 야훼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토착민들이 섬기던 바알 신을 따르자 이에 맞서 싸우는 여러 기사들을 싣고 있다(민수기 25장, 사사기 6장, 열왕기상 18장, 호세아서 2장. 시편 29편, 68:4)·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상아로 만든 그룹

유대교, 기독교 문헌에 나오는 날개달린 천사
 
 
 
아합은 국가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온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는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열왕기상 21장), 타 민족 여인인 이세벨과의 결혼, 바알 신 숭배 등 신명기 사가의 모세법에서 볼 때는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4대 오므리 왕가의 종교 정책은 이때에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열왕기상 17장∼19장).  가장 암울한 시대에 길르앗 출신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는 종교적으로 어두운 억압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를 새롭게 일으킨 예언자였다.

 
엘리야 선지자의 활동(시돈의 사르밧(Zarephath, 신약의 사렙다(Zarephath in the region of Sidon,NIV/Sarepta, a city of Sidon,KJV) 과부,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을 살림, 궁내대신 오바댜가 선지자 100인을 숨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서 대결함). “토지를 팔지 말 것은 하나님 것이니라”(레25:23~28).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토지분배(민27:1~11). 벧엘 사람 히엘의 두 아들(아비람, 스굽)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다가 여호수아의 말씀(수6:26)대로 죽음. 아합이 유다 왕(사위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간 3차 전쟁에 앞서 선지자 미가야(Micaiah)가 전쟁의 패전과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함. 변장한 아합의 갑옷 솔기에 우연히 쏜 화살에 맞고 피흘려 죽음. 아람왕 벤하닷의 군사를 지휘하는 군대장관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세우라고 하시고, 엘리사(사밧의 아들)에게도 이 사명을 주심(왕하8:7~15). 아합의 아들 70인이 사마리아에서 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예후에게 시체머리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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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아하시아 Ahaziah(B.C850~B.C849)(왕상 22:51~왕하 1:18/2년재위):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 사마리아에서 2년간(BC 854-853년) 이스라엘을 다스린 악명높은 왕. (유다 6대왕도 아하시아(여호람의 아들), 부친 아합왕의 왕위를 계승. 부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에 바알신을 섬겼다. 그는 왕궁 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재위한지 얼마 안되어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죽었다(왕상1:2, 대하20:35-37).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기적.  부왕 또는 섭정왕으로 아합과 함께 다스리다가 아비와 같은 해에 죽음. 사마리아 왕궁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죽음.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3-4).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8대 아하시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로 북이스라엘은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아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은 아람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굴욕적인 경험과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예후는 혁명을 감행해 놓고도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으며,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1,2,3차로 50부장과 50인대를 엘리야에게 보내 잡아오게 함. "아하시아의 사자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을때 왕은 즉시 오십부장과 수하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체포해 오도 록 했다. 이들이 엘리야에게 가서 왕명을 전했을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살라 버렸으며 두번째도 그렇게 했다"(왕하 1:9-1 2).

바알의 신탁을 바라고 에그론(남쪽 해안의 지금의 아키르로 블레셋의 가장 북쪽, 블레셋의 5도시는 에그론, 아스돗, 가드, 아스글론, 가사)에 있는 바알세붑(Baal-Zebub, ‘날아 다니는 파리‘의 뜻인 ’제붑‘과 ‘주‘를 뜻하는 ’바알‘의 합성어=’파리의 주인', '파리의 바알’)에게 병세를 물음.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파리신으로 병충해와 기타 재해를 예방하는 신)에게 사자를 보내어 병이 회복될수 있나 없나를 알아보게 했다"(왕하1:2). 결국 아하시아는 회개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여호와의 계명보다 금을 더 사랑하며, 여호와 신앙보다 이방신을 더 사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다. 모압의 배반

※ 여호람의 끝 아들 아하시야(여호아하스 또는 아사랴/유다 왕 아하시야는 여호람의 아들,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이다)는 아라비아인과 블레셋 사람의 침략시 모면하여 살았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왕 아하시아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아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대하2 0:35-36)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사밧과 아하시아의 결합을 못 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 배가 순항치 못하고 파선될 것을 예언했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 하였더라"(왕상 22:48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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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여호람,요람 Jehoram,Joram(B.C849~B.C843)(왕하 3:1~9:37/12년재위):

 32세에 즉위. 아합 왕의 아들, (유다 5대왕도 여호람(여호사밧 왕의 아들), 아하시야의 동생, 사마리아에서 치리, 예후는 곧 군대의 장군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북이스라엘의 왕 요람(여호람)과 남유다의 왕 6대 아하시야를 처형하고(열왕기하 9:14~29), "예후의 살이 요람의 어깨사이의 등을 쏘니 염통을 꿰뚫다",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열왕기하 9:30~10:11). 아내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모압왕 메시는 아합왕때에는 조공을 바쳤으나 아합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을 배반함.이스라엘과 유다가 동맹함. 엘리사의 활동은 수넴여인, 아람군대장관 나아만의 치료,아람왕 벤하닷(왕하8:15,13:3, 하사엘이 계승)의 병을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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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예후 Jehu(B.C843~B.C815)(왕하 9:1~10:36/28년재위):

  여호사밧 왕의 아들, 요람을 배반. 이세벨을 던져죽임.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예후가 기름부음 받을 것을 17년 전에 계시 받음. 약 40년간 유지해 오던 4대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과 점차 멀어져 갔으며, 민중들의 불만은 계속 커져 나갔다. 급기야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보내 길르앗 라못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열왕기하 9:1~3). 요람왕은 하사엘과의 전쟁에서 부상당했고 예후에 의해 배신당하고 죽음. 원래 아합 왕의 친위대 대장으로 요람왕의 군대장성. 아합가와 바알종교를 진멸함. 자손4대가 200여년을 통치함.

  예후는 외형적으로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피흘림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호세아서 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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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여호아하스 Jehoahaz(B.C815~B.C802)(왕하 13:1~9/17년재위):

  여호아하스 왕의 아들, 아람 왕 하사엘에게 패배.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내 아버지여’하고 울었고 엘리사가 화살을 쏘게 하고 땅을 치라 하니 세 번 치매 아람을 세 번만 치게 하리라고 함.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아들 벤하닷(Ben-Hadad)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함. 자기의 장자를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이름을 땀. 유다 8대왕도 요하스(아하시야 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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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요아스,여호아스 Jehoash(B.C802~B.C786)(왕하 13:10~25/16년재위):

여호아하스 왕의 아들, 유다 8대왕도 요하스(아하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아들로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내 아버지여’하고 울었고 엘리사가 화살을 쏘게 하고 땅을 치라 하니 세 번 치매 아람을 세 번만 치게 하리라고 함.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아들 벤하닷(Ben-Hadad)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함. 자기의 장자를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이름을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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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여로보암Ⅱ세 Jeroboam(B.C786~B.C746)(왕하 14:23~29/41년재위):

요아스 왕의 아들, 예후의 증손자.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이름을 땀. 북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3세(앗수르 왕, '불'이라고도 부름. B.C. 745-727년, 아닷니라리 3세의 아들)가 강대해져 징벌의 도구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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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스가랴 Zechariah(B.C746~B.C745)(왕하 15:8~12/6개월재위):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6개월 만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저를 모반하여 죽임. 예후 왕조 95년이 종지부를 찍은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살롬에게 암살당하고, 이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당하는 등 북이스라엘 왕조의 말기는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이로써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던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가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은 후, 신전을 부수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열왕기하 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로부터 쓸어 버렸다."(열왕기하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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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살룸 Shallum(B.C745)(왕하 15:13~15/1개월재위):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달을 치리함. 왕의 군대 일부가 지지하고 반란으로 군대 힘을 가진 한사람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디르사에서 치고 올라와 왕이 된지 한 달 만에 디르사의 군정장관 므나헴의 손에 죽다. 왕을 반역하고 살해함.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마차를 타고 출정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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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⑯므나헴 Menahem(B.C745~B.C737)(왕하 15:16~22/10년재위):

 '위로자'. 가디의 아들이다(주전771-760).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됨. 딥사에서 성내 시민들이 성문을 닫자 잔인무도하게 진멸함. 사마리아에서 십년을 치리. 군대 장관직에 있다가 사마리아에 올라가 살룸왕을 죽이고 왕위를 탈취하였다(왕하 15:14). 성격이 횡폭하고 잔인하였기 때문에 적이 많이 생기고 친애굽파와 친앗수르 파가 생겨 당파 싸움이 심하였다(호 7:11). 이때를 기회로 디글랏빌레셀 3세(앗수르의 군대사령관으로 있다가 왕을 제거하고 앗수르의 '불'이란 왕(Pul the king of Assyria)가 침입하자 그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고 보호국이 되기를 간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왕하 15:19-20). 이스라엘을 침공해 북방 갈릴리의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주전 734년의 “갈릴리 포로“이후 13년 뒤에 이스라엘은 멸망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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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의 몰락과 멸망

기원전 752년 5대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후 국제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3세는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기원전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시리아의 아르파드 왕국과 하맛 왕국을 정복하고 동부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반(反)아시리아 연합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 -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13대 여로보암 2세, 남유다에는 10대 웃시야(아사랴) 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부흥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12대 요아스의 아들인 13대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을 통치하면서 북쪽 다마스쿠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다(열왕기하 14:23). 18세의 젊은 나이에 유다의 왕에 올라 20년간을 통치한 10대 웃시야 왕은 예루살렘을 개수(改修)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수입하여 에돔 및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교역로를 열어 놓았다(역대지하 26:6~9, 11~15).

이 기간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였으며, 솔로몬 시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사회 내부의 부패로 이어져 망국병으로 번져 나갔다. 이 시대 북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빈부의 격차는 부패의 표상이었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적인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생활고(生活苦)에서조차 구제받을 길을 차단해 버렸다(아모스서 2:6f., 5:10~12, 8:4~6).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아모스서 4:4f., 5:21~24), 순수한 형태의 야훼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 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야훼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기원전 746년 ●13대 여로보암 2세(41년재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14대 스가랴(6달재위)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15대 살룸(1달재위)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16대 므나헴(10년재위)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17대 브가히야(2년재위)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18대 베가(20년재위)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북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호세아서 9:11~17, 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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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⑰브가히야 Pekahiah(B.C737~B.C736)(왕하15:23~26/2년재위):

므나헴 왕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치리.

...........................................................................................................................................................●⑱베가 Pekah(B.C736~B.C732)(왕하 15:27~31/20년재위):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는 사마리아 왕궁 위소(衛所) 높은 탑으로 자기 신복 세력 50명을 이끌고 충신들(아르곱, 아리에)을 죽인 사람으로 므나헴 10년 통치와 브가히야 2년 통치 후에 주군을 반역함. 브가히야의 장관인데 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이 재위기간 중에 앗수르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 주전745~727년) 왕에게 많은 주민들의 귀를 베고 눈을 빼고 손목을 끊거나 포로로 잡아 감. 베가 때에 “갈릴리 포로“ 사건이 일어남. 유다왕 아하스때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군으로 예루살렘 유대에 침입했다(왕하 16:5, 사 7:1, 대하 28:5). 유대 왕 아하스를 자기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거절 당하자 다브엘(Tabeal)의 아들을 유대 왕으로 세우려 했다(사 7:6). 그 결과 스스로 에브라임(B.C8세기 이후에 종종 북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됨,사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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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⑲호세아 Hoshea(B.C732~B.C724)(왕하 17:1~6/9년재위):

이스라엘 마지막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쳐죽이고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함.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포로로 잡아가고 드디어 북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 때에 유프라테스 강 서편 지역과 지중해 연안을 공격하기 시작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king of Assyria)의 공격을 받았고, 3년 동안(호세아 재위 7년부터 9년까지, 히브리인의 계산법은 1년미만도 1년으로 계산됨)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기원전 721년에 함락되고 말았다(열왕기하 17:1~6).

  아시리아의 속주 체제에 편입된 이 지역은 아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귀족들은 아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끌려간 포로는 2만7290명), 이 지역에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통혼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은 말살되어 갔다.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히브리 성서는, 멸망의 원인은 북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타 민족의 신을 섬겨 여호와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열왕기하 17:7~18). 


 
 


▶살만에셀(Sharmaneser): '술만 신이 주장함. ‘앗수르 음으로 '술만누아사리두' 곧 '술만 신의 머리가 되신다'는 뜻. 앗수르 왕은 5명인데 성서에 나오는 왕은 3세와 5세이다.

[1] 살만에셀 3세(B.C.859-824). 구약에 그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다른 기록에 보면 주전 853년 칼칼에서 아합왕과 그의 동맹군인 다메섹의 벤하닷의 군사와 싸웠다. 이때는 하는 수 없이 퇴군하였으나 주전841년 수리아를 공격했을 때 예후가 조공을 바쳤다.

[2] 살만에셀5세(B.C.727-722).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왕.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처음에는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쳤으나 애굽왕과 동맹하고 앗수르를 배반하니 살만에셀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이나 포위하고 호세아 왕과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왕하 17:3-6, 18:9-11). 사실은 살만에셀은 도중에 죽고 후계자인 사르곤2세가 주전 722년 12월 사마리아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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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南) 유다(왕상14~15장.왕하8~25장.대하~36장)

    B.C.586년, 20대 시드기야왕 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

 

①르호보암-②아비야-③아사-④여호사밧-⑤여호람-⑥아하시야-⑦아달랴 여왕-⑧요아스-⑨아마샤-⑩아사랴,웃시야-⑪요담-⑫아하스-⑬히스기야-⑭므낫세-⑮아몬-⑯요시야-⑰여호아하스-⑱여호야김-⑲여호야긴-⑳시드기야
 

 

같은 왕 이름(남,북): 유다 5대왕(여호람,요람)=이스라엘 9대왕(여호람,요람)/ 유다 6대왕(아하시야)=이스라엘 8대왕(아하시야)/ 유다 8대왕(요아스)=이스라엘 12대왕(요아스,여호아스)/ 유다 17대왕(여호아하스)=이스라엘 11대왕(여호아하스)/
 

 

●①르호보암 Rehoboam(B.C922~B.C915)(대하10장, 왕상 14:21, 31/17년재위):

  솔로몬 왕의 아들, 유다+베냐민지파로 즉위. “백성을 번성케 함”의 뜻.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겜에서 그를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여로보암과 열 지파들이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왕상 12:3-4). 그러나 이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세웠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왕상 12:12-14; 20).
  유다와 베냐민에 의해 남유다의 왕으로 세워진 르호보암은 군대를 결성하여 북왕국을 치려고도 했으나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포기하였다(왕상 12:21-24; 대하 11:1-4). 그 후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대하 11:4) 북이스라엘로부터 레위 족속과 제사장을 받아들이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대하 11:1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3년 동안 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다(대하 11:12).
  르호보암의 아내는 마할랏, 마아가 등 18명이었으며 첩이 60명이었고, 여우스, 스마랴, 사함, 아비야 등 아들 28명과 딸 60명을 두고(대하 11:18-23) 호화생활을 하다가 결국 애굽왕 시삭의 침략을 받아 왕궁의 보물과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왕상 14:21-28; 대하 12:1-8).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다(왕상 14:22-24; 대하 12:1-15). 하나님의 뜻과 백성의 소리를 저버린 한 독재자의 마지막이 어떠하다는 교훈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다(대하 11:18-23). 17년 간의 남유다 통치의 막을 내렸다(왕상 14:31; 대하 12:13, 16).

이 팔찌는 성전에서 약탈해간 금으로 만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르호보암 왕을 정복하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해간 애굽 왕 시삭에게 속한 것이었다.

 

르호보암의 선택의 결과(왕상12:1-17; 대하10:1-11)

  솔로몬 왕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솔로몬 왕의 통치에서 성전과 궁전의 건축으로 무거운 짐을 졌음을 말하면서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르호보암은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섬기던 노인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백성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보좌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노인들과는 정반대로 백성들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더욱 억압해야 된다는 의견을 말했다. 르호보암은 이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3일 후에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그는 노인들의 의견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선택해 그쪽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다윗의 집안과 자신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가 분리해 나가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왕으로 세우고 분리했다. 결국 르호보암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어졌다.

 

범죄한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왕상14:21-28; 대하12:1-12)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17년을 통치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사람 나아마였다. 그는 왕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여호와를 버렸으며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으며 조상들보다 여호와를 더 노하게 하였다. 결국 르호보암은 왕 5년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애굽22대왕조의 창시자,솔로몬에게 딸을 주므로 결혼동맹) 유다의 요새 성들을 급습하여 뺏은 다음 곧 예루살렘으로 밀어닥쳤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그리고 유다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르호보암의 요새화 정책(대하11:5-12)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왕이 된 르호보암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북쪽 지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예병을 소집해 그들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타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니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남쪽 유다와 베냐민지파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그는 방어의 필요성을 느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다 땅에 방비성을 건축하였다. 그는 주요 성들을 요새화하고 각성마다 지휘관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식량과 포도주를 비축하고 무기들을 확보하여 각 성들을 매우 튼튼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유다와 베냐민을 다스리며 방비하였다.

 

▶이방 여인의 아들 르호보암의 가정과 생활(왕상14:21-31, 대하12:1-16요절 : 대하12:14)

1.르호보암의 어머니

1) 암몬 종교는 밀곰을 섬기는 우상종교였다.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암몬족들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으로 미혹하였다.

(1) 그들의 종교는 무엇을 섬기는 것인가?(왕상11:5,7)

(2)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솔로몬 왕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왕상11:4,7-8)

2) 남편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준 암몬족의 아내 나아마는 그의 자식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1) 르호보암이 17년간 나라를 다스린 기록에 참고로 덧붙인 기사는 무엇인가?(왕상14:21,대하12:13-14)

* 남편과 자식에 대한 영향력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2 르호보암의 정치가 실패한 배경

1) 르호보암의 정치에서 실패한 두가지 기록이 있다. 살펴보면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이 잘못된 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1) 르호보암의 정치 초기에 일어난 문제는 무엇인가?(왕상12:1-20)

(2) 르호보암 왕 재위 5년만에 일어난 문제는 무엇인가?(왕상12:1-3,9-12)

2) 르호보암은 충신들과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조언과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까지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 르호보암의 나라가 애굽의 왕과 군사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게 된 신앙적인 원인이 무엇 때문이라고 하였나?(대하12:1-2)

(2) 르호보암이 환란을 통하여 배운 것은 무엇인가?(대하12:6)

* 르호보암의 고집과 불신앙의 행동 그 이면에는 어머니 나아마의 이방종교 영향이 컸다(대하12:13-14).유다와 베냐민에 의해 41세 때 왕으로 세워진 남유다의 르호보암은 군대를 결성하여 북왕국을 치려고도 했으나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포기하였다(왕상 12:21-24; 대하 11:1-4). 그 후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대하 11:4) 북이스라엘로부터 레위 족속과 제사장을 받아들이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대하 11:1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3년 동안 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다(대하 11:12).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 그가 아들들 곧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았으며)을 아내로 삼았으니 그 후에 압살롬의 딸 마아가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가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더라.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르호보암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웠으니 이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삼아 왕으로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더라”(대하11:17~23).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다(왕상 14:22-24; 대하 12:1-15). 선지자 스마야가 패하리라고 예고한 대로 결국 그는 5년에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받았으며(왕상 14:21-28; 대하 12:1-8), 17년간의 남유다 통치의 막을 내렸다(왕상 14:31; 대하 12:1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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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아비야Abijah,아비얌Abijam(B.C912~B.C913)(대하13장,왕상15장/3년재위):

  르호보암 왕은 아내가 둘이다(마할랏, 마아가), 모친 마아가(대하13:2, 기브아사람 우리엘의 딸/왕상15:2아비살롬의 딸), 역대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야’가 그의 이름에서 탈락되어 ‘아비얌’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호와는 아버시시다”라는 뜻, 아비야와 아사의 모친은 모두 마아가(왕상15:2,16). 아사의 선왕이었던 아비야의 모친도 마아가였으므로(왕상15:2,10)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는 계속 살아서 태후로 있었기에 그를 모친으로 표현했다.(대하15:16).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모친은 압살롬의 딸 마아가. 왕상 15:31에는 아비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스라엘왕 여로보암과 싸웠다(왕상 15:7).

장자는 여우스(대하11:21)였으나 마아가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아비야를 세자로 간택. 아비얌은 본명이고 왕위에 오를 때 아비야를 취함. 르호보암의 아들로 유다의 두 번째 왕이다(왕상 14:31; 15:1, 7-8). 그는 3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아비야로도 불렸다(대하 13:21). 유다용사 40만(대하 13:3)이 이스라엘 군대 80만과 에브라임 산에서 대진하여 50만명을 죽이고 대승함.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대하13:17,21)

 

마아가의 진짜 이름 : 아비얌의 어머니 ‘마아가’(Maacah)라는 이름이 역대하 13:2에서는 ‘미가야’(Micaiah.우리엘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대다수는 역대하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의아한 것은 마아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역대하 13:2에는 아비얌(Abijam. 아비야Abijah)의 외할아버지가 ‘우리엘’(Uriel)로 나오는데 열왕기상 15:2과 역대하 11:21에서는 ‘아비살롬’(Abishalom), ‘압살롬’(Absalo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석은 마아가가 압살롬의 손녀이며, 기브아사람 우리엘과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비살롬.압살롬(조부)⇒우리엘(부)⇒마아가.미가야(딸)⇒아비얌,아비야(왕)
 

 

●③아사Asa(B.C915~B.C913)(대하14장~16장,왕상15장/41년재위):

  아비얌의 아들, ‘헬‘ 아삽, 예루살렘에서 41년간 치리.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려고 선한 왕 아사를 세우셨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군사30만과 베냐민 군사 28만으로 구스사람 세라의 군사100만과 병거300승을 그랄 까지 쫓아내고 승리함.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우상물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찾으므로 평안을 주심. 모친 마아가가 만든 아세라 주상과 아세라상을 찍고 산당과 태양상을  제거했으나 아세라목상을 만든 모친 마아가는 태후(太后)의 위를 폐함.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오자 바아사와의 약조를 깨고 아람왕 벤하닷(헤시온의 손자.다브림몬의 아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매수하자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하기를 "왕이 아람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이후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라" 고 하매 크게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둠. 벤하닷으로 이스라엘 북방을 공략하게 하므로 아사왕은 라마를 취하고 그곳의 물자를 이용하여 남북 왕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지향하고 있던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최남단에 있는 라마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건축을 중단하자 그 돌과 재목을 가져와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함. 아사왕 39년에 발이 중병에 걸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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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여호사밧Jehosaphat(B.C873~B.C849)(대하17장~22장,왕상15장/25년재위):

  “신의 재판”이란 뜻, 아사 왕의 아들, 35세에 즉위. 모친 아수바(실히의 딸). 여호사밧은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개혁운동을 철저히 진행시키고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레위인과 제사장들과 방백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유다 전역을 돌며 율법책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여 5개 군단(아드나,여호하난,아마시야,엘리아다,여호사밧)에 총116만 군사를 직속관할로 두고 각 성읍마다 수비대가 조직되어서 이방세력이 넘보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과 화해를 꾀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유다와 이스라엘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자기의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훗날 큰 화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 여호사밧 왕 때에 서쪽의 블레셋이 공물을 바침. 이스라엘 왕 아합과 더불어 연혼함. 연합하여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치러 가자 할때 앵무새처럼 한목소리로 지껄여대는 거짓 선지자 400인은 '올라 가서 치소서' 하였다. 반면 미가야 선지자는 정반대의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하여 아합이 전쟁에서 죽임을 달할 것이라고 하므로 미가야를 옥에 가둠. 연합한 두 왕은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게 된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로 패배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견자 예후(이스라엘 왕이 아님,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도 아사 왕 때에 잘못을 경고했는데, 아들 예후도 여호사밧 왕에게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를 통해서 여호와의 책망을 듣고 깨달아서 개혁운동을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시킨다. 율법책을 가르치고 재판제도를개혁한다. 종교적인 문제의 송사는 대제사장(아마랴)이, 민사상의 송사는 유다 지파의 족장(스바댜)이, 관리는 레위인이 맡도록 했다. '다윗성'(본래 여부스(예루살렘) 사람의 산성인 '시온산' 성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가 두목이 되었다. 다윗이 정복하고 거기에 머무름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대상11:4~7)에 장사됨.

(1)제4대 유대왕 (왕상 15:24, 마1:8). 아사의 재위 중에 즉위(아사왕39년. B.C.892년)

(2) 그 부친 아사왕을 본받아 정치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으나 이스라엘왕 아합과 화친하여 혼인하였다(대하18:1).여호사밧은 아합의 동맹군과 아람왕 벤하닷에게 전쟁했으나 이스라엘 선지자 400명은 출정을 권했으나, 정반대로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구함.

(3) 아합과 같이 길르앗 라못을 치다가 실패하였다(왕상 22:29-36)

(4) 모압 암몬 세일인이 동맹하여 공격해올 때 여호와한테 간구하니 자기들끼리 피차 살륙하게 하여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 (대하20:1,23:24).

(5) 그는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유대국을 치리하였다(대하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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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여호람Jehoram(B.C849~B.C843)(대하21장,왕하8장/8년재위):

  '여호와는 존귀하심'. 요람, 32세에 즉위. 여호사밧 왕의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중의 장자. 이스라엘 9대왕도 여호람(아합의 아들). “여호와는 존귀하심”의 뜻, 재위중에 엘리야(그는 B.C.850년경 세상을 떠남)가 사역함(대하21:12)

[1] 유대왕, 여호람은 B.C.853년경 여호사밧이 죽기 전에 이미 섭정왕이 되었다(왕하8:16)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32세에 계승하였다(왕하 8:16).

(2) 여호람이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와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대하21:8-10).

아합은 시돈왕 엣바알(=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뒤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신의 추종자가 되어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세우고 아세라목상까지 세웠다(왕상16:31~33).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되었듯이, 여호람이 아합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남왕국 유다에도 우상숭배가 들어오게 되었다.

(3)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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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아하시야Ahaziah,여호아하스(B.C843)(대하22장,왕하8장/1년재위):

' 여호와의 소유'. 42세에 즉위. 모친 아달랴(오므리의 손녀).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왔던 침략군에게 여호람의 모든 형이 죽음. 여호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컸으므로 여호람 왕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만 남김 (이스라엘 8대왕도 아하시야(아합의 아들). “여호와의 소유”란 뜻, 여호람은 B.C853년 경 여호사밧의 섭정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부친 여로람이 죽은 후에 아하시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으로 이스르엘로 돌아옴. 요람이 병들자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로 내려가 방문함.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예후에게 죽다.

[1] 북 이스라엘 왕(B.C. 880-849). 부친 아합왕의 왕위를 계승. 부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에 바알신을 섬겼다. 그는 사마리아의 왕궁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재위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왕상1:2, 대하20:35-37).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죽었다(왕하 1:2).

[2] 남 유다왕 여호람의 막내아들(B.C. 842-841). 왕위에 있은지 겨우 1년만에 이스라엘왕 여호람과 연합하여 수리아를 치다가 북왕국의 개척자 예후에게 치명상을 입고 므깃도로 도망해 거기서 죽었다(왕하 8:29).

아하시아는 북이스라엘의 제8대 왕이며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다. 그는 유다왕 여호사밧 17년에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2년간(BC 854-853년) 이스라엘을 다스린 악명 높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왕 아하시아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아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대하20:35-36)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사밧과 아하시아의 결합을 못 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 배가 순항치 못하고 파선될 것을 예언했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 하였더라](왕상 22:48-49)

그후 아하시아는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파리신으로 병충해와 기타 재해를 예방하는 신)에게 사자를 보내어 병이 회복될 수 있나 없나를 알아보게 했다(왕하1:2).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슥3:4.왕하1:8,마3:4,히11:37) 선지자의 복장은 ‘털옷’이었다)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바알세불’의 변형. ”파리떼의 주(主)“란 뜻. 바알숭배의 중심지인 시돈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유독 블레셋에 속한 에그론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 바알 신앙의 중심지들 중 에그론이 사마리아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에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3-4)

아하시아의 사자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을 때 왕은 즉시 오십부장과 수하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체포해 오도 록 했다. 이들이 엘리야에게 가서 왕명을 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살라 버렸으며 두번째도 그렇게 했다(왕하 1:9-1 2).

결국 아하시아는 회개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여호와의 계명보다 금을 더 사랑하며, 여호와 신앙보다 이방신을 더 사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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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아달랴 여왕Athaliah(B.C843~B.C837)(대하22장,왕하11장/6년재위):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오므리의 손녀로 유다집의 씨를 진멸하지만 아하시의 아들 요아스는 여호사브앗(여호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과 유모가 숨겨 성전에서 6년간 피신함. 외국인 용병의 지원을 받은 제사장들의 과감한 쿠데타였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안식일에 출번,입번하는 자들 중 1/3씩 성전문을 지키고 1/3은 왕궁에, 1/3은 기초문에 있고,벡성들이 성전 뜰에 있을때 병기를 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만 성전에서 지키며 요아스를 호위하고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만세를 부르며 반역하다. 왕궁어귀에서 아달랴를 칼로 제거한 후 요아스(7세)의 반정으로 그가 즉위함. 바알제사장 맛단을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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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요아스Joash(B.C837~B.C800)(대하24장,왕하12장/40년재위):

  7세에 즉위. 아하시야의 아들, 아하시야의 왕족 중 생존한 아들,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을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정칙히 행함. 성전을 중수함. 여호야다는 130세에 죽고  요아스는 타락과 파멸로 충언하는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마저 무리에게 돌을 맞고 성전뜰에서 죽음. 여호와는 아람(수리아) 군대를 보내 징벌하심. 요아스는 모반으로 신하들에게 죽음. 이스라엘 12대왕도 요아스=여호아스(여호아하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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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아마샤Amaziah(B.C800~B.C783)(대하25장,왕하14장/29년재위):

  요아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여호앗단. 은100달란트로 이스라엘용사 10만을 삯내다. 유다 30만명과 이스라엘 10만의 남북연합군 40만으로 출정하려다가 선지자의 권유대로 이스라엘 용병을 돌려보내자 유다성읍을 쳐 노략질하고 앙갚음. 단독출정으로 남쪽 에돔 족속을 도륙하고 대승리. 염곡의 승리로 에돔 2만을 격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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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아사랴,웃시야Azariah,Uzziah(B.C783~B.C742)(대하26장,왕하15장/52년재위):

  아마샤의 아들, 16세에 즉위.모친 여골리야(예루살렘 사람).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일을 다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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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Jotham(섭정시대)(B.C750~B.C742)(왕하15장/16년재위):

●⑪요담Jotham(King)(B.C742~B.C735)(대하27장,왕하15장/16년): 25세에 즉위. 웃시야(아사랴)의 아들, 모친 여루사.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암몬과의 전쟁승리(암몬자손이 은100달란트,밀1만석,보리 1만석을 드렸고 제2년,제3년에도 그와 같이 드림(대하27:5).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3세의 세력확장에 대비하여 동맹후 함께 유다를 손아귀에 넣고 앗수르에 대응하고자 함. 이러한 계획은 요담왕 때 시작되어 아하스왕때에 본격적으로 침략이 나타남(왕하16:5, 사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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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아하스Ahaz(B.C735~B.C715)(대하28장,왕하16장/16년재위):

  요담의 아들, 20세에 즉위. 아하스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그 자녀를 불사르고"(대하28:3)는 베니게인들의 예배의식의 일부였다. 모압(그모스=몰렉)과 암몬인 등의 의식에서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인간의 최고의 제물은 자신들의 맏아들(왕세자)이라고 생각했다(왕하3:27,미6:7). 이스라엘 왕 베가(르말랴의 아들)의 침략을 받아 용사12만명이 죽고 아내와 자녀 20만명을 사로잡아 감.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과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이 자기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 앗수르 왕(디글랏빌레셀3세=‘불‘.B.C74746~728. 대하28:20.왕하15:19)에 원군을 청하나 앗수르가 아람보다 더 혹독한 압제자가 되어 유다백성을 괴롭히고 약탈함. 친앗수르정책을 고수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는 것에 대항코자 할때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말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외친다. 아람왕 르신이 엘랏을 쳐 유다사람을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아람사람이 엘랏에 거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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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히스기야Hezekiah(B.C715~B.C687년)(대하29장,왕하18장~19장/29년재위):

  아하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아비야(스가리야의 딸). 주상(가나안사람들이 섬기던 '돌기둥'. 남성신인 바알의 상징)과 아세라상(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 바알을 상징하는 주상(돌기둥)과 함께 산당의 대표적인 예배대상을 부수고 '느후스단'(놋뱀에 붙인 이름으로 놋조각이란 뜻='놋으로 만든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불렀다. 앗수르왕을 배척. 블레셋을 침. 왕 4년에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사마리아 침략으로 국내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반대하고 집안에 우상을 몰래 숨겨두고 섬기며, 국외는 침략으로 재난을 당함. 왕 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B.C705~681)의 침공을 받음, 살만에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이 죽자 히스기야는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와 에글론 등과 함께 반앗수르정책을 실시하자 이에 반발한 앗수르의 새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성전의 금은을 제공하며 회유함.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 침공때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군 18만 5천명이 죽음.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됨. 발라단의 아들(바벨론왕 부로닥발라단=므로닥발라단(사39:1)이 정확한 이름)이 앗수르를 고립시키기 위해 신흥바벨론은 우다와 동맹을 맺고 병든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냄. 운명의 적인 바벨론은 신성한 예루살렘과 영광스런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하고 언약궤를 옮겨가며 고국을 떠나온 백성을 흩어놓고 다윗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70년동안 황폐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산헤립 왕 자기 아들들에 의해 죽임을 하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 원정에서 돌아온지 20년이 지난 B.C.681년경으로 산헤립의 본국철군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히스기야 왕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침공에도 선지자 이사야는 산헤립이 반드시 물러갈것이라 예언한다. 이후 예언대로 앗수르군은 하룻밤에 18만5천의 군대가 전멸하고 산헤립이 죽고,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에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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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므낫세 Manasseh(B.C687~B.C642)(대하33장,왕하21장/55년재위):

  '잊어버림'. 12세에 즉위했으나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의 권유와 자문으로 국정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기야의 아들. 모친 헵시바. 남북조를 통틀어 가장 오랜 재위기간인 55년간이나 통치한 왕.

므낫세는 불행하게도 친 앗수르파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앗수르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됐다. 훌륭한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하고 잘못된 신하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이방신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됐다. 부친 히스기야와는 반대로 악정을 행하고 바알 숭배를 장려하여 자기 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바쳤다.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죽인 죄악으로 앗수르에 의해 쇠사슬로 코를 꿰고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감.

저가 말년에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인해 그토록 탈선한 왕인데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게 됐고 왕위가 지속되는 은혜를 받았다.

첫째, 므낫세가 어린 나이에 주변 인물을 잘못 만난 것이 불행이었다. 돌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자.

둘째, 잘못된 통치와 사상은 중간에라도 고쳐야 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큰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궁궐 동산 곧 웃사(Uzza)의 동산에 장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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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아몬Amon(B.C642~B.C640)(대하33장,왕하21장/2년재위):

  22세에 즉위. 므낫세의 아들(헬‘ 아모스). 모친 므술레멧. 신복들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임. 웃시야(Uzza)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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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⑯요시야Josiah(B.C640~B.C609)(대하34장~35장, 왕상13장. 왕하22장/31년재위):

  아몬의 아들. 8세에 즉위. 모친 여디다. 선지자 스마야로 하여금 출생 이전에 그의 사역과 이름이 예언됨(왕상13:1~2). 이 예언을 한지 300여년 후에 출생한 인물이다(왕하23:15~16). 여기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점은 참으로 놀랍다.(바사왕 동방사람 고레스에 대한 사41:1~ 44:28의 예언도 B.C538년 바벨론을 정복함으로써 정확히 성취된다. '부름받은 고레스'에서 '기름받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이므로 고레스를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방인으로서(사45:5) 여호와를 알지못하는 사람이므로 그를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아, 바사와 바벨론을 정복해 유다백성을 귀환시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자라른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준행케 함. 종교개혁 스바냐의 예언활동.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이다(대상3:15~18).

아마겟돈(계16:16,히브리 음)은 이스라엘 골짜기 맞은 편에 있다. 왕하9:27 역사적인 전투지(대하35:22,슥12:11,삿5:19).기원전 1468년 애굽왕 투트모세 3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연합군을 무찌름. 당시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에 밀려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애굽왕 바로 느고(Pharaoh-nechoh, 주전609-579, 느고 2세. 스에즈 운하를 제일 먼저 계획한 사람)가 신흥 바벨론 왕(나보폴라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너져 가는 앗수르를 돕고자 팔레스타인을 거쳐 갈그미스로 향했다. 만일 이전쟁에서 바벨론을 이긴다면 애굽은 메소포다미아 전지역을 장악하는 대국이 될것이었다. 그러난 요시야왕은 바벨론의 세력을 확장하고, 앗수르가 몰락하는 것이 유다왕국에 이로울 것으로 판단해서 바로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진격했으나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시야가 바로느고의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B.C709년경의  일이다. 기원전 609년 요시야는 애굽왕 느고(제26대 왕조의 2대왕 삼메디고의 아들 느고 2세. 그는 B.C609~594년까지 다스렸다)를 막다가 므깃도(Megiddo, 가나안 땅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스르엘 평야지역 하이파(Haifa) 남동쪽으로 약 32km 지점, 예닌(Jenin) 북서쪽 약 17.6km 지점, 애굽에서 다메섹으로 통하는 통로로서 나사렛으로부터 18km 지점에 있으며 많은 전쟁을 치룬지역이다)에서 전사(왕하23:29. 대하35:20~27). 므낫세와 아몬의 시신이 매장된 묘지에 장사됨. 예레미야도 그의 죽음을 맞아 특별히 그에 애가를 지음으로써 그의 죽음이 백성들엑 얼마나 심각한 재난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대하35:25). 기원후 1917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군은 터키군을 이곳에서 무찌름. 계16:16(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Armageddon)’= '므깃도산((Har megiddo)’이라는 히브리 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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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⑰여호아하스Jehoahaz(B.C609)(대하36장,왕하23장/3달재위):

  23세에 즉위. 요시야 왕의 아들, 모친 하무달. 치리한지 석달만에 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 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하며 애굽 왕 느고가 또 그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왕으로 세움. 바로느고가 립나에서 가두어 왕이 못되도록 하고 애굽으로 끌려가 죽음. 이스라엘 11대왕도 여호아하스(예후의 아들). .............................................................................................................................................................

●⑱여호야김Jehoiakim(B.C609~B.C598)(대하36장,왕하23장/11년재위):

  25세에 즉위. ‘엘리아김’을 여호야긴으로 개명. 요시야왕의 둘째아들.여호야김의 아들은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이다(대상3:16). 모친 스비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3년간 섬기다가 배반함. 갈대아(신바벨론제국을 형성한 여러 소국가들중에서 중추국임. 고대에는 '시날'이란 이름으로 알려짐)와 아람과 모암과 암몬 자손의 군대에 침략당함.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다. 느부갓네살의 성전기명약탈은 여호야김 재위 3~4년경부터(단1:1)이고, 그후 점차 약탈이 강화되어 11년후인 시드기야 통치 말기(왕하25:13~17)에는 아무것도 남지않고 예루살렘 시가와 성전과 궁궐 등이 모두 불태워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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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⑲여호야긴Jehoichin(B.C598~B.C597)(대하36장,왕하24장/석달 재위):

  18세에 즉위. 여호야김의 아들, ‘헬’ 여고냐(마1:11). 포로로 잡혀 간 여호야긴의 아들은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이다(대상3:17~18). 모친 느후스다. "여호야긴이 잡힌지 37년"(왕하25:27)이란 시드기야11년(예루살렘이 함락당한지 26년이 되는 해)+26년동안이나 포로로 옥에 갇혀지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신바벨론제국의 창시자 나보폴라살의 아들,B.C.605~562)이 죽고 에윌므로닥(원명은 '아윌마르둑'=느부갓네살에 이어 왕위에 올라 2년을 통치했으나 처남 네리글리살에게 살해당함)이 바벨론왕이 되자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

●⑳시드기야(Zedekiah)(B.C597~B.C587):(대하36장,왕하24장/11년재위):

  21세에 즉위. 모친 하무달. 느부갓네살왕은 여호야긴의 숙부,요시야왕의 셋째아들인 ‘맛다니야(여호와의 선물)’를  시드기야(여호와의 의)로 개명함.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이다(대상3:15). 왕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섭정자로 본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계속해서 유다왕으로 대접했기 때문이다(왕하25:27~30).

예레미야의 예언(렘25:11, 29:10)을 듣지 않음으로 갈대아왕(느부갓네살을 가리킴. 갈대아사람의 본고장은 바벨론 남동쪽 해안지방이었는데 거기서 바벨론으로 점점 밀고 들어갔다.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도 갈대아 종족이었는데, 그 당시의 갈대아는 바벨론을 뜻함)의 손에 붙여 바사국이 주재할때까지 이름.

70년(유다가 갈대아에게 처음으로 굴복한 때는 B.C601~600년이었다(왕하24:1). 그리고 첫번째 바벨론 강제 이주시기는 여호야긴 또는 시드기야의 1년. 곧 598년 또는 597년이었다(왕하24:8~12). 예레미야의 예언에 나타난 70년이란 숫자는 분명히 첫번째 이주의 경우에서는 상징적인 뜻으로 쓰였다. 70이란 수를 고집한다면 첫번째 이주는 여호야긴 3년에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은 렘25:11, 29:10에서 유다백성이 포로로 잡혀간지 70년만에 바벨론은 메대-바사군에 의해 멸망하고 바사의 고레스왕이 실권을 장악하게되므로 70년 뒤에 바벨론 왕을  징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에윌므로닥과 다른 가문에서 나온 왕위 찬탈자인 네르갈사레셀(느부갓네살의 사위), 나보니두스 등이다.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538년이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공격은 B.C.587년 1월. 남유다 멸망(B.C.5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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