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스크랩] 성전 안에 있는 것들 - 3

옹기장이 2013. 1. 24. 15:43

성전 안에 있는 것들 1.

존 B. D. 페이지 지음 / 이우진 옮김

 


금으로 빛나는 전체 성전은 주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영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사람이 그분의 영광을 말하는도다.”(시 29:9). 희생단은 성전 밖의 정면에 위치했습니다. 반면에 언약궤는 베일(휘장) 안쪽에 있었습니다. 이 희생단으로부터 언약궤까지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오직 제사장들만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들이 건물의 금빛나는 광채와 그 내용물을 바라볼 때 모두가 “영광!”이라고 외쳤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내용물들과 함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림자였습니다. 그 영광의 궁극적인 실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했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갔던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감


낭실 쪽으로 두 개의 높은 놋기둥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제사장 한 명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성전을 들어갈 때 아름다운 두 짝의 문을 통과합니다.


들어가는 문들


이 문들은 열왕기상 7:50과 역대하 4:22에서 모두 “전(殿)의 문”이라 불립니다. 그 문들에 대한 묘사는 역대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고 오직 열왕기상 6:33 이하에서만 발견됩니다. 이 “전의 문”을 위하여 올리브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벽의 사분의 일을 차지했습니다. 성전의 너비가 이십 큐빗이므로(왕상 6:2), 그 문의 입구는 다섯 큐빗(2.5 미터)이었습니다. 이 입구에는 전나무로 만든 “두 문”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문은 두 문짝으로 접히게 하였으며 다른 문도 그러했습니다(왕상 6:34). 문에는 “그룹과 종려나무의 핀 꽃”들이 새겨져 있고 “그 새긴 곳에 맞게 금으로 입혀졌습니다.”(왕상 6:35)  고대 사회에서 도금을 할 때는 새겨진 형상들 위에 알맞게 얇은 금판을 덮고 금 못으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대하 3:9).


벽과 문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나무에 있었습니다. 문에는 전나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사야 14:8을 상기시킵니다. “참으로 전나무도 너로 인해 기뻐하며”  이 말씀은 전나무 문이 기쁨의 상징인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놋 희생단은 전의 문과 줄을 맞추어 밖에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그 문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숨겨진 연결점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2:2에서 그 연결점이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신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 속에서 기쁨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초월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견디고 그 큰 수치를 경험하는 동안, 주님 앞에는 완성된 사역을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기쁨, 하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될 기쁨, 그리고 구속받은 백성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누리게 될 기쁨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제사장은 문을 통과했고 이제 성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소 안


이 금으로 된 성소는 모양이 직사각형이었고 치수는 그 길이가 사십 큐빗, 너비가 이십 큐빗이었습니다.


그 안의 모든 내용물은 금으로 된 것들이었습니다. 역대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열왕기에는 간략하게 기술된 금 희생단이 베일(휘장) 정면에 서 있었습니다. 열 개의 정금 등잔대와 열 개의 보여지는 빵을 놓은 금상은 벽들을 따라 일정하게 배치되었습니다(두 개 모두 역대기에서 간결하게 묘사되었고 열왕기에서는 단지 목록에만 들어 있습니다.).


두 경건한 성경 기자들 모두 솔로몬이 만든 이러한 금 기구들의 목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왕상 7:48-51)(대하 4:19-22).


성령님은 두 기자들로 성소 안에 있던 어떤 기구들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이러한 말씀들은 간략하게 기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열 개의 순금 등잔대


이것은 역대기에서 항상 “순금 등잔대”라 불립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 “순금 등잔대들과 그것들의 등잔들”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는데(대하 4:20), 등잔대의 이 등잔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했습니다(출 27:30). 그러므로 “화젓가락”과 “부집게”를 사용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등잔대는 평범하지 않고 “꽃”으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젓가락과 부집게처럼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대하 4:20). 열왕기나 역대기 어디에도 그것들의 겉모습에 대해서는 치수나 자세한 점들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형태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성막에 있던 것들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성막의 등대는 각각 하나의 중심 줄기와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성소 안에서 순금 등잔대가 위치한 곳을 밝혀주고 있습니다(왕상 7:4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앞에서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다섯 개씩” 위치하도록 하여 북쪽 벽을 따라서 등잔대 다섯이 있었고, 반대쪽인 남쪽 벽을 따라서 등잔대 다섯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 개의 등잔대에 있던 칠십 개의 등잔은 밝은 빛을 발했습니다. 이 빛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시편 119:105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의 말씀은...등불이요” 그 말씀에 우리 주님의 진술을 추가해 봅시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더 나아가 바울이 에베소서 4:21에서 말한 것을 보겠습니다.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실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왔으며”  바인(Vin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해했습니다. "에베소서 4:21의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같이”의 진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처럼, 모든 충만함과 모든 범위를 포함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6에 나타난 그분의 말씀과 실제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하느니라.” 등잔대와 등잔대에서 나오는 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와 같은 진리의 충만함을 잘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비록 열왕기와 역대기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지만, 기름은 등잔대가 빛을 비추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리십니다. 성령님께 대해 그러한 이름을 붙이시면서 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드러난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역대상 28:15에서는 “은 등잔대”에 대해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의 위치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뉴베리가 제시한 대로라면, 그것들은 아마 성전의 다락들에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에서 금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은에 대한 이 간단한 언급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은과 금, 이 두 금속은 각각 등잔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들은 구속에서 영광까지의 진리의 완전한 범위를 설며해 주고 있습니다. 그 진리 가운데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열개의 보여주는 빵(진설병)을 놓는 상


등잔과 상응하는 열 개의 “보여주는 빵을 놓는 상”이 성소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다섯은 오른 쪽에, 다섯은 왼쪽에 있었습니다. 또한 “금대야 백 개”가 있었습니다(대하 4:8). 이 금대야들은 금상들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성막에서도 모양이나 크기가 같거나 유사했을 불명확한 수의 대야가 보여주는 빵(진설병)을 놓는 상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출 25:29). 대야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마도 포도주를 담는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성소의 기구들 중 일부인 상들은 역대기에만 묘사되고 열왕기에는 묘사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구들의 목록을 요약한 곳에서는 열왕기와 역대기 모두에서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보여주는 빵을 놓는 금상”(왕상 7:48), “보여주는 빵을 놓는 상들”(대하 4:19)이 바로 그것입니다.


상들이 등잔대에 가까이 있었던 사실은 그것들이 항상 성소의 빛을 받으며 서 있었던 것을 알게 해줍니다. 만일 상들이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등대의 빛과 상들이 상징하는 바 교제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습니다. 빛과 교제에 대한 중요한 사상이 요한일서 1:7에서 표현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가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 믿는 자 상호간의 교제는 하나님이 영원히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성도들 모두가 빛 가운데서 살아갈 때 얻게 되는 결과입니다.


교제는 하나님을 믿는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무리들 간에 있게 되는 협력 또는 친교를 말합니다. 교제는 불신자들이 그들의 변화되지 못한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사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도 우리와 교제가 있게 하려 함이니, 실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요일 1:3) 우리를 전율시키는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 그림자인 금상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금상은 나무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금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금상은 성전의 영광을 말해주는 금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교제는 “영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며, “영광의 주”이신 그 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엡 1:17)(고전 2:8)


성경은 상의 크기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제의 범위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이 성전의 성소 안에 위치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성소가 교제의 영역인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교제의 영역은 ‘은밀한 곳’인 우리의 가정 또는 모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 위에는 “보여주는 빵”이 있었습니다. 보여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먹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여주는 빵은 제사장들에 의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되었고, 그들은 성전에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보여주는 빵의 이와 같은 규칙적인 교체는 비유적인 뜻을 갖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매일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단단한 식물”을 먹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상 28:16에 의하면 “은으로 된 상”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 은으로 된 상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은 등잔대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성전 기구들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다락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금 희생단


이 기구는 역대기에서 “금 희생단(the Golden Altar)”이라 불립니다(대하 4:19). 그러나 열왕기에서는 “금 희생단(the altar of gold)"으로 일컬어집니다.


열왕기상 6:20,22의 간략한 묘사에서, 그것은 “희생단”이라 불립니다.  그것은 “백향목”으로 만들어졌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성전 안에서의 그 금 희생단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 있었습니다(왕상 6:22). 그것은 지성소를 막고 있었던 베일의 정면에 금 희생단이 서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금 희생단은 그 재료로 나무의 이름이 등장한 유일한 기구였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영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두 성경 기자는 금 희생단의 목적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향 희생단”에 쓸 금의 중량을 정했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솔로몬은 “주 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여 그분께 봉헌하고 그분 앞에서 향기로운 향을 태우며 항상 빵을 차려 놓고 안식일과 월삭과 주 우리 하나님의 엄숙한 명절들에 아침저녁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대하 2:4). 아침과 저녁에 놋 희생단에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고 금 희생단 위에서 향을 사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솔로몬 시대 수세기 전에 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제정하신 것이었습니다(출 30:1,7,8). 그렇게 매일 섬기기 위해 제사장은 향을 사르는 향로를 가지고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향로는 금 희생단 위에 놓였으며 수많은 향이 거기에서 올라오곤 했습니다. 이때는 “분향하는 시간”으로 알려졌으며 밖에 모인 백성들이 큰 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반시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눅 1:9 이하).


이러한 사실들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전의 금 희생단 위에서 매일 두 번씩 향을 사르는 일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서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았고” 이는 그들이 “죽음으로 인하여 지속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죽음을 인해서 계속해서 사역을 이어가는데 장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할 수 없는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제사장 직분을 대신 이어받을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항상 살아 계셔서....중보하고” 계십니다(히 7:23-25). 이 위대한 진리의 그림자가 백향목에 나타납니다. 단을 만드는데 사용했던 백향목은 쉽게 독충의 공격을 당하거나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썩지 않는 백향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계신 분”이시며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히 계신 고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바울은 유사한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실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롬 8:34). 백향목의 희생단을 덮었던 금은 부활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저녁 희생을 특별히 마음에 두고서 기도의 응답을 주님께 바라면서 시편 기자는 시편 14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같이 놓이게 하시며 나의 손을 들어 올림이 저녁 희생물같이 놓이게 하소서”  이 구절은 금 희생단 위에서 향을 사를 때 향기로운 연기가 계속 올라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들 역시 하늘 성소에 앉아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께 향기롭게 올라가야만 할 것입니다.


금 희생단 위에서 향을 사르는 것은 제사장들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나 역대기 어디에서도 솔로몬 지배 아래에서 제사장이 성전에서 그 직무를 수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열왕기상 9:25에 따르면 “솔로몬이 자기가 주를 위하여 쌓은 희생단 위에...주 앞에 있던 희생단에서 분향”했습니다. 제사장 대신에 왕이 그 직무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구절 앞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자기가 주를 위하여 쌓은 희생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고”  “해마다 세 번씩”이란 해마다 갖는 세 번의 큰 절기(무교절, 칠칠절, 초막절)를 말합니다(신 16:16). 이러한 때에 왕은 그가 연중 다른 때에 했던 것처럼(대하 8:13) 놋 희생단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그의 행위로 인해 성경에서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제사장 제도가 쇠퇴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성막에서 엘 리가 의자에 앉고 그의 두 아들이 놋 희생단에서 범죄했을 때부터(삼상 1:9, 2:29) 제사장 제도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 제도가 쇠퇴해 가는 것과 더불어 군주제는 점점 힘을 얻어갔고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은 왕 밑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참된 왕이시자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장차 올 천년왕국 시대에 제사장으로서 왕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6:13).


- 존 B.D 페이지 지음, 이우진 옮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전도출판사)에서 발췌 -  

출처 : 설교전문학교-18기동기회
글쓴이 : - 복음에 빚진 자 - 원글보기
메모 :